깊은 숨

by jungsin


올드팝을 좋아한다. 취향은 인격의 생김새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캐릭터의 한 모습은 올드팝으로 드러나는 어떤 모양이다.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문화와 낭만을 좋아하는. 가령 미국, 팝송, 풍요로운 음식, 런던의 아주 오래된 펍의 이미지 같은 것.

.

내가 올드팝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미 스무 살 때부터 알았다. 용산에서 비싼 aiwa 오디오 컴포넌트를 사면서 서비스로 받은 CD가 하필 칠팔십 년대의 올드팝 명곡이 나열된 기획 음반이었다. 당시 가진 CD가 몇 장 없었기에 그 CD에 들어있는 Roberta Flack의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이나 F. R. David의 Words 같은 플레이 리스트를 CD가 닳도록 들었지만, 나는 쉽게 질리지 않았다.

이내 몇 해를 지나 이십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자신이 그러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을 만큼 오랫동안 거의 씨씨엠만 들었다. 그렇게 여전히 종교적 문화에만 심취해 있을 뿐이던 마흔 언저리의 어느 해, 필리핀에서 우연히 미국식 레스토랑에 갔었다. 뜻밖에도 그곳에서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나의 취향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일행과 하루종일 차를 타고 고생하며 돌아다니다 저녁 식사를 하러 찾은 그곳은 스테이크 기름 냄새가 물씬 나는 미국 서부 분위기의 식당이었다. 무척 배고프고 지치던 차, 자리를 잡고 앉아 겨우 숨을 고르면서 나는 찬찬히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카우보이 모자나 화려한 마초적 인테리어 소품들을 둘러보던 나는 동공이 점점 커지면서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내 그 공간의 분위기에 젖어들어 마음이 활짝 열렸고, 모임 속에서 수다스럽게 활약하며 우걱우걱 고기와 음료를 먹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그 식당은 당시 그 나라에 머무는 열흘 정도의 시간 동안, 아니, 그 땅을 방문한 네 번의 선교 여행의 모든 식당 중에서도 나의 취향에 가장 부합하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전통 식당이고 맛집이고 뭐고, 그냥 미국식 팝이 흘러나오는 자유롭고 풍요로운 분위기의 식당에서 기름진 소고기와 큼지막한 얼음 컵에 목젖을 찌르는 코카콜라가 가득 담긴 테이블이 최고인 사람인 것이다. 평소에는 정제되어 잘 드러나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자연인으로서의 나란 그토록 단순하고 낭만을 사랑하는 면모를 가졌던 것이다.

미국 서부의 평야 지대, 동양이라면 몽골 초원 같은 데서 태어났으면 행복했을 사람이 비좁은 서울에서 마음의 넓이가 간장 종지 같고 예민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에게 치이며 살자니 겨울 낙엽처럼 파리해지는 느낌이다. 초원에서 말젖이나 짜면서 레어로 구운 양고기 스테이크를 포크 채로 뜯으며, 이리야 하고 눈썹을 날리며 사냥을 다녔어야 할 사람이. 인구 과밀 도시에서 허름한 자전거를 타고 당근이나 하러 다니니 우울하지 않을 수 있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중고거래 약속을 잡은 날은 왜 매번 이토록 눈보라가 휘몰아치거나 한파가 습격하는 날인지. 이건 윤기 나는 갈퀴를 가진 갈색 말이야, 자전거가 아니고. 여긴 초원이지, 도시의 아파트 숲이 아니야.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내리는 눈발을 헤치며 불안한 브레이크에 의지에 수 km를 달리는 나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할 여유도 없을 만큼 추위가 몸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패달을 구르는 두 발의 구두 속 발가락 끝으로 남은 공간이 시리고 아려, 마음의 여유도 얼어붙고 있었다.

어쨌든 근자 텀블러의 난 상황을 극복할 크리스마스 컬러의 중고 텀블러 하나와, 손 일기를 쓰기 좋은 보급형 유선 노트 다이어리 하나를 갖게 되었다. 아메리카의 카우보이 소울은 서울에서 당근 거지의 육신이 되고 말았다.



’ . ’. ‘ , ; ’ . . ”

, ‘ ’ , . ‘ ,’ ’ . ‘


눈사람처럼 눈을 헤치며 달리는 사이 길가로 그 빵집이 보였고, 잠시 후 그 길거리가 나타났다. 내내 언 마음이 뜨거운 양동이 물이 부어진 눈사람처럼 힘없이 녹는다. 마술처럼 숨이 달라진다. 그러니까, 이제 자전거를 멈추고 팝 라디오를 들어야지 생각했다. 그제야 겨울을 즐길 숨결을 갖게 되었다. 집까지는 이제 오 분이면 도착할 것이었지만 지금부터는 꼭 즐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신비롭게도 딱 열한 시였다. 내내 외로운 북유럽의 겨울에 날 고립시키는 듯한 적막한 클래식을 멈추고 신혜림의 골든디스크를 연결했다. 그리움으로 가득한 마음은 늘 허기져 영혼을 채우고, 그리움을 곱씹고 또 곱씹어야 한다. 끝없이 끝없이. 이 긴 여행은 언제 끝날까.


, ‘ ’ , . ‘ ,’ ’ .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