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찾아가는 길

나를 떠나면서, 내가 되기

by jungsin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




1

다수의 기독인들은 이 본문을 자아를 다 지워버리라는 식으로 이해한다. 씻을 수 없는 원죄를 가진 죄인으로서의 자아는 폐기의 대상일 뿐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과연 우리의 이해처럼 개인의 개성과 의지를 다 지워버리라는 말씀일까. 한 사람의 독특성을 다 표백시키고 그리스도의 1)낙인이 찍힌, 똑같은 모양의 공산품으로 거듭나라는 말씀일까.

실제로 그렇게 강단에서 선포되고 그렇게 아멘으로 화답되곤 한다. 진리가 한 컵의 압착 주스처럼 간명해지는 순간이다. 풍부한 과즙을 가진 오렌지가 오렌지향 과당 주스로 변모한다. 진리는 왜소해지고 더 이상 어려울 것 하나 없어진다. 단지 불가능한 미션으로 남을 뿐, 우리의 볼은 달떠 있고 예배는 뜨거웠다. 모든 것은 아름답다. 목욕물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린다.

필자가 대면하며 느끼는 바 성서는 심오하고 어려운 책이다. 그것의 기계적 이해는 때때로 하나님의 뜻과 의도에서 우릴 멀어지게 한다. 그렇게 쉽게 말해지고 동의되고 덮어지려면 처음부터 펼치지 않는 게 나았다. 성서는 한 구절의 왜곡이 인생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험한 책이다.



2

나의 신앙은 이원적이었다. 어린 시절 제사를 지내는 명절 아침이면 작은 어머니가 과수원 산소 뒤에 숨어있는 나를 찾으러 오곤 하셨다. 작은 아버지와 형 동생들이 줄줄이 기다리는 제사상은 내가 붙들려 온 뒤에야 움직이곤 했다.

캠퍼스 예배나 기독교 동아리 수련회 등의 활동을 통해 너무 은혜를 받은 나머지 흥분했던 시절도 있었다. 대학생이었던 시간의 어느 한 시절은 통화 연결음이 서울 모테트 합창단이 부른 마귀들과 싸울지라-였고. 홈피 대문은 근조 리본을 그려 넣은 증명사진으로 걸어 두었다. 한 간사님이 깜짝 놀라 전화를 해오시기도 할 만큼 하여튼 유별났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이제 나의 옛사람은 없다는, 선포의 의미로 바꾼 것이라며 안심을 시켜드려야 했다. 내가 없기는커녕. 너무 팔팔해 감당하지 못하던 한 시절이었을 뿐이다.

그러던 어떤 시기의 절정에는 트럼프에 뒤진다고 하면 서운할 정도로 극단적이고 선명한 극우 기독인이었다고 할 수도 있었다. 사람은 안 바뀐다고,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누가 그랬을까.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데. 다만 내가 천지개벽했다.




3

이즈음 나는 무척 숨이 막힌다. 무척, 아주 무척. 매일 수레바퀴처럼 똑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책임과 무게감에 짓이기는 느낌으로 버틴다. 안 하던 독서 모임이나 동네 친목 모임을 해보기도 한다. 남몰래 혼자 맥주를 홀짝이고 술기운에 잠들기도 한다. 슬프고 애달픈 꿈을 꾸기도, 아득하게 어린 시절을 더듬어보는 꿈을 꾸기도 한다. 깨어나면, 그럴수록 더욱 나를 찾아 파고들어 보곤 한다. 무너진 건물 잔해 아래 깔려서 한 치도 못 움직이고 있으면서, 빗물을 마시는 심정으로 나를 기억해 내려 안간힘을 쓴다. 눈도 못 뜬 새끼 강아지가 어미 개의 젖가슴을 찾아 입에 물고 세차게 빨듯이, 시간 속에서 잊힌 자신을 기억하고 되살려내기 위해 읽고 써본다.




정녕 나란 말인가


동시에 부인되어야 하는 나를 고민한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할 나의 면모와 현실은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성공하고, 실패한다. 이리로 가라고 하면 저리로 가고 싶어 하는 반골 기질은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했지만, 후회도 의혹도 남기지 않았다. 차갑게 정돈된 오래된 연인처럼 끔찍한 관계는 없다고 생각했다. 의심과 사유, 반항과 방황은 뜨겁게 신앙하는 방식이었다. 가지 않던 길을 가보았다. 가령 박찬욱의 영화 같은 것도 보려 2)‘애쓰고’, 3)야한 영화도 좀 본다든지. 그러면서 뭐가 좋은 길인지 뭐가 좋지 않은 길인지, 뭐가 빛인지 뭐가 어둠인지, 뭐가 나인지 뭐가 내가 아닌지 확인해 볼 수 있었다. 빛과 어둠, 화해와 죄, 의와 불의, 나와 내가 아닌 것을 왕래했다. 더딜지라도 어떤 종합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4

정이 있어야 반이 있을 수 있고 그래야 합이란 새로움이 있을 수 있듯, 자아가 없이는 자아의 부인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지워지기 위해 있는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다 사라져야 할 개성이라면 하나님은 왜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이 우리를 다 다르게 만드셨을까. 쌍둥이조차 어디 하나는 꼭 다를 수밖에 없었을 만큼 집요하게. 굉장한 지성의 낭비다.


내가 없는 상태에는 내가 없다. 내가 되지 않은 채 걸은 걸음도 걸음이 아니다. 내가 되지 않은 채 산 삶도 삶이 아니다. 내가 되지 않은 채 한 것도 한 것이 아니고, 내가 되지 않은 채 안 한 것도 안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나를 기뻐할 수도, 나를 근심할 수도 없다. ‘매끄러움은 현재의 징표’라며, 그것은 ’Jeff Koons의 조형물들과 아이폰과 브라질리언 왁싱을 연결해 준다 ‘며 거칠게 비판한 한병철의 말은 오늘 우리 교회의 강단과 회중 사이의 조건반사적 아멘 열창(Pablov의 개)에도 직렬 연결된다.


내가 되지 않은 시간에는 내가 없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 세계는 내가 되지 못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는 세계이긴 하다. 그러나 그는 누구도, 아무도 아니다. 적어도 존재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누구도 아무도 아닌 누군가가 있는 세계란 그러나 없는 세계다. 그러니까 내가 없는 시간은 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일 뿐 아니라 세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다.


이 말들이 말장난처럼 느껴진다면, 자아의 완전한 폐기 교리도 말장난으로 응당 느낄 수 있어야 할진대. 우리의 이성은 선택적으로 작용한다. 우리 병든 믿음의 현주소는 선택적 진화론이다. 아프게도 퇴화하는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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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randed, 주인의 소유권 표시를 위해 말의 엉덩이에 달군 쇳덩이를 지지는 일.

2) 아직 기괴하고 복잡한 심리 묘사나 야함 같은 것이 버겁기는 하다.

3) 물론 그래서는 안 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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