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에스 루이스는 욕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적게 욕망하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청년 시절에 ‘갈급한 내 맘 만지시는 주~’라고 시작하는 찬양을 정말 좋아했다.
이즈음 나는 이전과는 다른 행보이기도, 전형적이기도 한 시간을 보냈다. 보통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식의 뻔한 행보이기도 한 방식으로 지내보고 있다. 술, 여자, 돈. 이 세 가지로 압축되는 욕망의 회오리 언저리에서 나는 성의 없이 나부꼈다. 개업 식당 앞에서 몸을 흐느적거리며 서 있곤 하는, 사람 모양의 웰컴 풍선처럼 말이다. 그처럼 지루할 정도로 전형적인 도파민 마취제들을 맞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쁜 일이었지만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결국 나쁜 일이었다. 그리고 오늘 설교 후기이자, 개인적인 사유의 기록으로서, 나의 목마름에 대해 끄적여보려 한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요한복음 4:13-14
스타벅스에 가방을 두고, 자전거를 굴러 동네 교회로 향했다. 일곱 시 칠 분쯤이었다. 청년기에는 이따금 한 번씩 예배를 드리러 목마른 마음으로 오곤 하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실로 몇 년 전에 마지막으로 갔던 것인지도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오랜만에 가는 것이었다. 아득히 오랜만의 발걸음이었지만 생각보다는 덤덤했다.
예배당이 2층인 줄 알고, 꺾어 들어가다 아닌 것을 알고 앞에 걸어가는 여자 성도님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가 드디어 그 공간에 당도했다. 조금 늦게 도착한 사람들이 속속들이 자리를 찾아 앉고 있는 등, 아직 분주한 기운이 남아있었다.
찬양 한 곡을 부르고 잠시 후 설교자가 강단에 올랐다. 설교 본문은 요한복음의 우물가의 여인이 나오는 이야기 속의 두 구절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정숙한 장로교 예배를 드리게 된 터라 약간의 기대감을 갖고 설교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본문에 나오는 단어의 뜻이 설교자가 외치는 그런 의미인지 원어를 찾아보고 싶어 성경 앱을 다시 설치할까 고민도 했지만. 용량이 부족했다. 몇 만원을 주고 각종 번역본과 원어 해석을 볼 수 있는 패키지를 덥썩덥썩 샀었다. 그 시절에는 돈이 생기면 신학 책을 사고 배를 굶곤 했는데. 그러고 나면 신기하게도 고프던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렇게 서점 한구석, 나만의 자리에 틀어박혀 읽고 싶은 것들을 아무 책이나 뽑아서 읽다 보면 아득히 나만의 세계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배고픔은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때 더 심하게 느끼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인간은 현기증 나는 무제한의 자유속에서 더 결핍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찰나도 말하자면 그런 자유 속에 있었다. 성경 앱을 찾아보고 싶다는 현기증 나는 선택의 갈등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 지. 어떻게 하는 게 내 목마름을 더 채울 수 있는 길일지. 설교를 흘려보내고, 핸드폰의 용량을 만들고 앶을 설치하고, 원어를 찾아 스스로 이해하기까지는 오 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다 그만 두고, 차라리 눈을 감고 설교에 집중력을 높여 들어보았다.
그리고…. 곧 고개를 떨구었다. 잠깐 졸았지만 전반적인 내용을 꼼꼼히 들은 편이었다. 메시지도 형식도 간증이나 인용한 오래 전 신학자의 말이나, 무엇도 새롭지는 않았다. 우리의 갈증은 하나님으로밖에 채울 수 없다는, 불조심 포스터처럼 선명하고 단조로운 메시지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서 말할 뿐이었다.
박지원이 정치 구 단이라면 나는 아마 교회 육 단 정도는 될 것이다. 교회 경험에 관한 한,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개신교 종교 문화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면면을 경험했다. 그러니까 이제 어떤 설교를 십 분쯤 들으면 설교자의 진정성이나 참신성, 지성이나 연구의 깊이, 준비된 정도를 느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설교자는 보수적인 장로교회의 교역자다웠다. 군더더기 없는 설교자의 말투로 청중의 눈높이에 맞는 메시지를 담백하고 평이하게 잘 전했다. 오늘 설교는 나에게 질문을 남겼다. 새로운 질문이라기보다 이미 갖고 있던 물음의 흙을 발바닥으로 한 번 더 단단하게 다진 경험이었다.
예배는 한 시간만에 끝났고, 나는 덤덤하게 자전거의 킥 스탠드를 발로 차서 다시 가방을 두었던 스타벅스로 돌아왔다. 예배 드리기 전의 나와 어떤 질적 차이도 없는 상태로 무덤덤하게, 다만 한 잘문을 붙잡고 끄적여 본다.
내 영혼을 하나님으로 채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영혼이란 단어도 바꾸자. 내 마음의 갈증을 하나님으로 채운다는 것은 대관절 무엇인가. 공예배나 개인적인 경건 활동 속에서 뜨거운 기도나 찬양 뒤에 후련해진 기분의 상태일까. 개인 기도와 예배 등을 통해 하나님께 다 토로하고 나서 내 문제나 절망 슬픔, 우울감이 조금이라도 나아진 상태일까. 그런 활동이 없었더라도 하나님이 전권적으로 나를 사로잡아 내가 그를 믿고 의지하여, 마음의 공기가 달라지고,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지고, 두려웠던 상태에서 용감해진 상태로, 무력했던 자리를 터록 일어나 분연히 삶을 살아나갈 수 있는 상태로, 마음의 문을 닫고 미워하는 상태에서 마음을 열고 사랑할 수 있는 상태로, 그렇게 새로운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전인격적으로 변화된 상태일까.
그 모든 것이 맞을 수 있겠지만. 위에 열거한 말들을 나는 적어도 조금씩 이상은 다 경험한 바가 있다. 하나님으로 나를 채우는 게 어떤 것인지 적어도 오순절주의적 성령 체험의 차원에서는 경험해 보았기에, 그렇게 나는 머리로나 가슴으로나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제 나는 하나님으로 내 영혼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해야만 한다.
나의 인생은 (이전에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진, 희망찬 삶의 상태에서) 인간적 희망이 다 꺾인, 새로운 국면에 들어와 있다. 그에 따라 나의 물음의 깊이나 진지함도 이전과는 다른 차원이 되었다. 평범한 경험을 한 평범한 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나, 평범한 목사의 설교나 상담을 통해서는 나의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 국면에서 나는 오직 고독한 상태에서 나 자신에게 의지하거나, 단독자로서의 나와 하나님 둘 사이에서만 해결해야만 할 것 같다고 해야겠다. 내가 직면한 주제들은 그처럼, 눈물겹도록 외롭고 가녀리고 고통스럽고 두렵고 엄격한 문제가, 다시 말해 그러니까, 큰 희망을 가지기 문제가 되었다. 이렇게 쓰고 나니 묘하게도 희미한 희망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러다 말 것이라는 걸 잘 안다. 이제 나에게는 체념이 가장 희망과 가깝다.
또는 그냥 이대로 강아지가 자기 꼬리를 물으려 제자리를 도는 듯한 종교 생활에서는 점점 멀어지며, 어떤 삶의 여행의 지점에서, 그러니까 한 신학자의 말처럼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나의 갈증이 채워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나는 스스로 자신이 답을 모르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경험과 사유의 결과,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 나의 구원은 오직 사랑일 것이다. 다만 머리로 아는 일은 아는 일이 아닐 뿐이다. 완전히 가슴이 비어버린 이런 상태에서 나의 힘만으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주님의 도움을 구할 뿐이다. 신이여 도우소서.
다만 나는 글을 쓰는 것이 조금씩 더 좋아지고 있다. 적어도 이렇게 글을 순간은 슬픔이나 우울함이나 무력감을 잊을 수 있다. 문학이라는 장엄한 바다도 아주 느리게, 글쓰기와 비슷한 속도로 좋아지고 있다. 그렇다고 그것들에 본격적으로 투신하거나, 대단하게 열정을 보이는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것일 수록 조급해 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는 일이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 무엇이든 정말 사랑하는 것을 한 번은 더 만나고 이 감사하고도 증오스러운 생을 끝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