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과일, 그리고 소주.

by jungsin


아직 2월인데, 봄이라도 온 것처럼 자꾸만 몸이 노곤해지고 잠이 쏟아졌다. 짙은 어두운 색의, 발이 많이 달린 음침한 벌레처럼 캄캄한 곳에 있었다. 누군가 장판을 걷어내면 그제야 기겁을 하고 수많은 발로 기어 도망가는 비겁한 벌레처럼, 습하고 메퀘한 냄새가 나는 장판 틈과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숨죽여 온종일 가만히 있었다.


날이 막 어두워진 저녁. 관심 있는 성서 본문의 설교를 찾아 틀어놓고 누워 있다가 잠들었다. 자다가 깨서 허겁지겁 뜨거운 물에 밥을 말아먹고, 좋아하는 작가의 인스타 라이브를 들으며 누워 있다가 또 잠들었다. 일어나서 남은 부분을 들으며 실시간 댓글도 세 개쯤 남겨보았다. 라이브가 끝났고,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무력했다.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걱정만 하고 있었다.


해야 하는데 할 수 없는 일들.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일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 힘이 넘치는데 힘이 없다. 피곤하지 않은데 피곤하다. 책으로 벽을 쌓아놓고 나의 세계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 아이엠샘의 샘처럼, 어린 딸을 보호시설에 맡겨야 하는 현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자신을 자책하고, 언어를 잃어버리고, 눈물도 말라버린 그처럼.


시간은 열한 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열두 시 안에 하려고 했던 자질구레한 일들이 많았다. 성경 한 구절 읽지 않은 채 하루가 다 간 주말이었다. 걷기 앱에는 이백오십 걸음이 기록되어 있었다.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원두 통을 열었다. 그라인더 뚜껑을 열었다. 알루미늄 케이스 채로 들고 원두를 들이부었다. 드르륵드르륵 돌리고 돌리다가 두어 번을 놓쳐, 동그란 나무 손잡이 장식이 빙그르르 돌았다. 원두 가루를 모카 포트에 담았다. 남은 가루는 다시 그라인더 서랍에 넣었다. 원두 가루 한 톨 남기지 않았다. 모카 포트를 전기 레인지 위에 올려놓고 레버를 돌렸다. 빠르고 절제된 동작들. 내 삶을 전진시키지 않는, 작은 일들에는 이토록 능숙하다.


다짜고짜 냉장고를 열었다. 눈에 보이는 람부탄 열매 가공 품을 꺼내 차가운 쟁반 위에 올려놨다. 미국 땅콩, 이어폰, 플라스틱 독서대, 동전, 화장품 가게 여직원이 추천해 준 로션. 책상 위에 쌓인 잡다한 물건들을 다 바닥에 내려놨다. 바닥은 나중에 치우면 되지. 지금 반드시 치워야 하는 건 책상 뿐이었다. 그것으로 충분, 아니 최소, 아니 최소한 그것으로 충분했다.


커피와 람부탄을 들고 돌아왔다. 마침내 책상 앞에 앉았다. 후르릅. 과일맛 베이스의, 산미가 강조된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작은 스테인리스 포크로 람부탄 열매를 찍어, 입에 넣고 아작 씹었다. 향긋하다. 커피도, 과일도 향기롭다. 커피와 과일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조합이구나. 감칠맛이 입에 감돌았다. 키 164cm 정도의 날씬한 여자가 하고 있던 봄 머플러에서 날 것만 같은 상큼한 감칠맛이다. 온몸의 세포가 간질간질해졌다. 열두 시가 되기까지 십분 정도 남았다. 휴대폰을 켜고 미루고 미룬 일들을 팍, 팍, 팍 해나갔다. 무엇을 해도 잘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엄청난 몰입도로 물건을 고르고, 오늘까지 써야 하는 포인트를 사용하고, 온라인 결제를 하는 일 따위에 사용했다. 열한 시 오십구 분까지 모든 일들을 완벽히 했다. 어떤 착오도 없었다.


라디오에서 이소라의 내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아요가 나왔다. 내,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말아요. 정말 오랜만에 들었다. 그녀와 헤어지고 음악 스트리밍 앱에 끄적인 글과 함께 올려놓았다가, 공개로 해놓지도, 마음 편히 듣지도 못했던 노래였다. 첫 소절에서 커튼 뒤 창문 틈에 숨겨놓은 소주 반 병을 오늘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커피와 과일의 감칠맛에, 온갖 물성에 갇혀있는 그런 뻔한 어른이 되어 버렸다. 나는. 고작 이런 일들에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이 되었다. 겨우 착오 없이 사는 사람이 되었다. 쌔액쌔액 숨만 쉬지 말고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너는 얼마나 무기력하고, 양순하고, 지루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가.



아무것도 안 하고 무력해 있는 내가 답답하다.

좀 재밌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만 두려워해야 한다.

다 마셔버려야 한다.

좀 팽팽히 당겨져 살아 있어야 한다.

닥치는 대로 마시고 먹더라도.

입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대단할까.

다 써버려야 한다.

쓰는 것이 나를 어떻게 헤칠 수 있을까.

살아야 한다.

먹을 것들 따위 입에 그냥 다 때려 넣고 삼켜버려야 한다. 커피, 과일, 그리고 소주.

배설하기 위해.

움직이기 위해.

깨어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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