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한테는 왜 안 물어봐유.

by jungsin



여느 저녁 때처럼. 난 서점에 있었다. 어제 산 책들 중 한 권을 환불하고 재결제 하려고 계산대 앞에 있을 때였다.



아니 왜 저한테는 가입해라 적립할 거냐, 안 물어봐유.



왼쪽으로 다섯 걸음쯤 떨어져 있는 계산대가 조금 소란스러웠다. 직원과 고객의 평범한 계산 상황 같았는데, 왜인지 고객이 안달복달하는 모양새였다.


고객은 육십 대 후반에서 일흔 정도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였다. 순박하고 억척스러운. 우리 모두 알고 있는, 그 한국의 아주머니, 또는 할머니. 녹록지 않은 세월을 견디고 꿋꿋이 이겨낸 우리네 어머니. 앱 설치니, 아이디니, 이메일이니.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전혀 새로울 것 없지만, 언제나 새로운. 50년생 김지영이었다.


아마 이제 막 삶의 여유가 생겨서 서점에도 들리기 시작하신 모양인데. 그녀는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공룡에게 의욕과 질투, 불만과 두려움 등이 뒤섞인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든 혼란스러운 감정을 볼 멘 목소리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게 뭔 소리에유. 1퍼센트, 2퍼센트..

휴, 고객님. 제가 아까 설명드린 것처럼 10만 원 이상 구매하시면 실버 등급이 되시는데요. 고객님은 적립 조건이 안 되셔서 제가 처음부터 말씀을 안 드린 거예요. 실버 등급부터 1퍼센트 적립이 되거든요. 실버 다음에 골드, 플래티넘까지 있는데요. 플래티넘이 되시면 3퍼센트까지 적립받으실 수 있으세요. 고객님은...

3퍼센트 적립은 누가 받는다구유?

플래티넘 등급이요 고객님. 휴...

그럼 플래티넘은 어떤 사람들이 되는 건데유.

처음부터 다시 설명드릴 게요, 고객님. 회원 가입하시고 아이디 만드셔서 10만 원 이상 구매하셔야 적립 조건이 되시고요. 10만 원 이상 구매하면 실버 등급이 되고요, 그다음에 골드, 그다음에 플래티넘... (...) 고객님은 아직 10만 원 미만으로 구매하셨네요.



쉽고도 어렵고, 짧고도 긴 설명이었다.



적립 조건에 해당되시면 제가 말씀드렸죠, 고객님... 아예 해당이 안 되셔서 말씀을 안 드린 거라고요 고객님. 고객님은 일반 고객이세요.

일반은 뭐고 특별은 뭐예요. 아니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 그게 뭐에유.

고객님은 아직 실버 등급이 아니세요. 저희는 회원 등급 제도가 있거든요 고객님. 차근차근 더 구매하셔서 조건이 되시면 적립하실 수 있으세요.

아니 그러니께, 그게 다 무슨 소리에유. 제가 저번에도 여기서 책 몇 권씩 샀었는디이, 이? 저는 왜 안 돼유.

제가 한번 더 처음부터 다시 설명드릴게요, 그럼, 고객님. 회원 가입하시고, 아이디 만드시고, 10만 원 이상 구매하시면 실버 등급이 되시는데요. (....)



직원도 이를 악 문 것 같았다. 지난한 대화였다. 아주머니와 낫 비지 스태프. 둘의 체온과 목소리, 감정이 그라데이션 업 되고 있었다. 절정에 이를 것인가가 문제일 뿐이지, 이미 정해진 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어딘가로 동반 수렴되고 있었다.


주변에 있던 네다섯 명 정도의 고객들과, 나와, 내 앞에 있는 낫 비지 스태프의 신경이 다 그 대화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깊은 수영장의 수조 바닥 한가운데에 있는, 강한 흡압력을 가진 배수구 구멍에 우리 모두의 발이 끼인 것만 같았다. 누구도 그 작은 구멍에서 빠져나올 수도, 그 구멍 속으로 온전히 들어갈 수도 없었다.


실은 우리 모두 크게 다른 마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금은 답답했고, 조금은 흥미로웠고, 조금은 화나고, 조금은 아려왔다.


알라딘 영화를 봤을 것 같지도, 알라딘이 무슨 뜻인지를 알 것 같지도, 알라딘은커녕 어떤 프랜차이즈 서점이든 네댓 번 이상 와보았을 것 같지도 않은 아주머니도, 낫 비지 스태프도, 추리닝 차림에 모자를 눌러쓴 젊은 커플도, 이 시간쯤 혼자 서점을 찾는 메마른 눈빛의 아저씨도. 모두 속이 조금은 쓰리고 아릿했을 것이다.






epilogue.

환불을 마치고, 나는 고고한 백조처럼 유유히 소란스러운 계산대 주변을 떠났다. 화장실에서 어슬렁 거리며 거울을 보고 있을 무렵, 근래 언젠가 플래티넘 권한을 지인들 몇 명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이벤트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나의 플래티넘 혜택을 자연스럽게 그 분과 공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벤트를 지금도 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우선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갔다. 계산대까지 빠르게 걸어가며 아주머니께서 아직 서점에 계신지 두리번거려 보았는데, 아주머니는 안 보이셨다. 계산대에서도 이미 떠나고 안 계셨다. 하긴. 내가 그 아주머니였어도 이 정확하고, 무오하고, 메마른 공간에는, 그토록 위트 없는 서점에는 한 순간이라도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아주머니. 아주머니가 플래티넘 회원이 아닌 것은 아주머니 존재의 고결함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묵묵히 고된 세월을 살아오신 아주머니의 존재가 이미 플래티넘이에요. 플래티넘 멤버십 따위 잊어버리시고, 자본주의의 괴물 따위 짓밟아 무시하시고, 플래티넘한 하루하루를 사셨으면 좋겠어요. 속닥속닥 속삭여 바람에 실어 날려 보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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