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를 시작하며 봉지를 데려왔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몰티즈를 데려와서 봉지라고 이름을 붙여줬다. 쨔식... 죽을 듯 살 듯 생사를 오고 가는 사건들을 몇 차례 겪고 나더니 이제는 질기게 잘 살고 있다. 봉지가 들어오고 한두 달이 되어갈 때쯤 봉지 예방접종 맞추러 갔던 병원에서 베베님, 한 마리를 더 달고 왔다. 그것도 고양이를 말이다. 스튜디오에 나무 컵보다 작은 녀석을 데려와서 좋댄다.
함께 동거한 지 삼사개월이 될 쯤 봉지가 떠났다. 스튜디오에 얽매이는 일상으로 요 녀석들을 돌봐줄 수가 없어서다. 고양이, 야루는 고양이 성격상 혼자서도 씩씩 깨끗하게 잘 있는데. 문제는 요놈 봉지다. 여기저기에 자기 분비물을 질러대고 낑낑거린다. 그래 분비물은 청소해주면 되지만 정말 문제는 그놈의 정서다.
어린 시절 동대문 남대문 강남을 가리지 않고 데리고 다녔던 추억과 예의에 어긋난 -강아지도 강아지만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베베님의 교육관으로- 행동을 했을 때 큰 벌을 받았던 기억으로, 봉지는 참 정스러운 강아지가 되어버렸다. 늘 서글픈, 뭔가를 생각하고 딴 것을 상상하는 그 눈빛과 자태는 참으로 정스러움 자체가 되어버렸다.
그런 봉지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고역이었나 보다. 외로움 때문인 것 같다. 야루와 함께 있다고 하지만 야루는 혼자 있으면 더 편함을 얻는 동물이기 때문에 그다지 봉지의 외로움을 신경 써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낮에는 햇살에 딸려온 외로움을 이겨내야 하고 밤에는 어둠에 배인 외로움을 이겨내야 했던 봉지는 점차 야인이 되어 갔다.
외로움을 강담할 수 없어 그 스트레스로 우리가 선물해준 인형 친구들을 물어뜯고 산산조각을 만들어 놓고 유기하질 않나, 여기저기에 배설물로 칠을 하지 않나, 잠깐 안아 주면 실성한 강아지처럼 정신을 못 차라지 않나, 말 못 하는 강아지이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고스란히 그대로 잘 전달했다. 점차 야인이 되어가는, 컨테이너 박스 안의 최민수로 변해가는 봉지를 그대로 둘 수 없어, 우리보다 더 잘 키울 수 있는 집으로 입양 보냈다.
그런 봉지가 입양된 집에서 많은 사랑을 받아, 그 사랑으로 럭셔리 강아지가 되어 나타났다. 어찌나 럭셔리하던지 몸에서 빛이 나고 향기가 흘렀다. 스튜디오 근처로 입양을 보낸지라 간간히 만났다. 그러다 일이 바빠 뜸하게 한 번씩 보게 되었는데. 아니 이 정스러운 강아지. 우리만 만나고 집에 가면 시름시름 앓는단다. 그리고 회복된단다. 정스러운 강아지, 봉지가 말이다. 내심 잘 키웠다고 자부심을 얻은 베베님은 이제는 만나지 말잖다. 봉지와 새로운 가족들을 위해서란다.
그래 여기까지가 봉지의 이야기다.
그런데 봉지 이야기에 등장했던 야루. 그놈이 요즘 문제다. 봉지가 있던 시절과 지금 야루만 있는 시절. 변화된 건 전혀 없다. 바쁜 일상으로 야루를 신경 쓸 수가 없는 생활 말이다. 야루는 원래 혼자 있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동물이고, 배설물도 잘 가리고 목욕도 스스로 잘하고 스스로 잘 크는 녀석인데, 별수 없다. 바쁜 일상으로 녀석에게도 점차 관심이 적어지니, 앙탈을 부린다. 엉덩이 교태 쇼, 이쁜 걸음 훅 자빠지기, 청아한 야옹 소리 내기, 갸우뚱 이쁜 눈 바라보기 등등 엄청난 애교 전략을 부리지만. 우리의 바쁜 일상의 노곤함을 이길 순 없다.
야심 찬 애교 전략도 이젠 먹히지 않아, 매일 밤, 매일 새벽을 운다. 녀석이 이용하고 있는 새벽녘 '야오옹옥옥옹'하는 괴성 전략은 이제, 폭포수에서 득음하는 수준이 되었다. 햇볕정책이라던가, 머리 나쁜 이놈은 바람 정책을 섰다. 강한 방법을 쓰니, 따르는 것은 벌이다. 벌을 내려도 꿈쩍도 하지 않고 새벽녘이면 꾸준히 괴성 전략을 고수하고 있는 야루.
별수 없다. 봉지처럼 야루도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 사람들은 야루를 수술시켜라고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장기간 혼자 있게 된 외로움이다. 봉지를 아프게 했던 외로움, 혼자 있길 즐기던 야루에게도 영향을 주는 것이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늘 안고 사는 게, 외로움이라는 고질적인 병인 것 같다. 그 외로움의 근원에는 사랑 받음에 대한 갈급한 심정이 있고, 그 사랑에 대한 갈급함에는 사랑받지 못했다는 상처 어린 생각이 있다. 이런 외로움이라는 게 발동을 하게 되면, 봉지처럼 자포자기 해버 리거나, 야루처럼 인생에 수많은 전략과 전술이 쓰이게 되니 말이다. 창조주가 주관하시는 인생을 바라보기보다 사람을 보고, 상황을 보게 되니.. 씁쓸하다.
야루가 사람이었다면 창조주를 만나게 해 주었을 텐데, 어쩔 수 없다. 더 많이 안아주고 더 많이 쓰다듬어 주어야겠다. 녀석이 바람 정책을 고수한다면 나는 햇볕정책으로 바람을 잠재워줘야겠다.
인생이 늘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