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내 하루의 마지막 화음을 고르는 의식

피카르디 기법처럼, 단조였던 하루도 장조로 마무리할 수 있다면!

by KeepWhatMovesMe

피카르디 기법


단조의 곡을 장조로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마지막 화음을 장조로 전환하여 마무리하는 기법을 뜻한다. 특히 바흐나 르네상스 시대 음악에 자주 사용되었으며, 단조의 느낌을 장조로 전환하여 긍정적으로 마무리하려는 방식이다.



얼마전 회사 임직원들이 쓰는 Portal 메인에 이런 글이 게시가 됐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온 말이라고 하던데 "우울한 사람은 과거에 살고, 불안한 사람은 미래에 살며, 평안한 사람은 현재에 산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종종 불안한 사람'이라는 것이 솔직한 내 평가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불안했다가, 너무 좋았다가'가 자주 반복되고, 바람과는 달리 '안온하고 평온한'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다.


나는 많은 것들이 '미래'에 가 있다. '불안한 사람은 미래에 산다'라는 노자 선생님의 탁견에 놀랄 수 밖에 없다. 나는 '미래'가 어떠해야 하는지 늘상 꿈꾸고(여기까지는 좋다) 그렇다보니 꿈꾸는 '미래'에 다가가기 위해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로 사고체계가 짜여져 있다. 그래서 미래와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 이것저것 하는 것이 나의 '성취'이기도 했지만, 이것이 부정적으로 발현될 때도 있다. 미래가 보이지 않거나, 그 꿈꾸는 미래와 모습과 지금 현재가 조화가 되지 않거나 간극이 벌어진다고 인지될 때마다 쉽사리 불안이 잠식해오기도 한다.


불안에 기인한 나의 이런 '단조적' 요소를 '장조적' 요소로 바꾸기 위해서 노력을 꽤나 해왔는데, 내겐 그것이 '일기' 였던 것 같다. 그리고 어제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는 모임에서 '피카르디'라는 용어를 들었을 때,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내 삶의 피카르디는 어쩌면 일기였구나''



꼬박꼬박 일기를 써온지는 5,6년 정도 된 것 같다. 매일 밤마다 하루에 벌어졌던 여러가지 일들이 채 정리되지 못한 채, 감정의 찌꺼기를 안고 그대로 잠드는 날이 많았었다. 하지만 일기를 통해서 내가 그 감정을 왜 느끼는지, 그리고 그 감정은 결국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내 감정과 내 삶을 반추할 수 있었다.


일기를 쓰는 매체는 종이노트에서 에버노트, 다시 종이로, 그리고 지금은 ‘노션’으로 돌아왔다. 형식도 바뀌었다. '감사한 일 3가지' 같은 단순한 구조에서, 지금은 나만의 정리 방식, 조금은 체계적이고, 조금은 마음을 다독이는 목차로 구성하고 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일기 쓰는 방법에 대해서, 좀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일기라는 작은 기법이 어떻게 내 하루를 '장조'로 마무리하게 도와주었는지에 대해.


내 하루를 정리하는 목차


먼저 내가 일기를 쓰는 목차는 아래와 같다. 그리고 이렇게 목차가 정리되기까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이자, 직접 뇌과학 클리닉을 운영하고 계신 뇌과학자 조용상 교수님의 도움이 있었다. 내가 몇년 단위로 자율신경계에 문제가 있어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 때, 친분이 있던 교수님과 정기적으로 상담을 한 적이 있었고 교수님의 도움으로 아래의 목차를 컨설팅 받았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파란색 표시가 된 것이 특히 교수님의 조언이고 나머지는 내가 살짝 변형한 것이다.

일기포맷_다시.png

각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 Events

- 여기는 주로 이 날을 기억할 수 있는 1~2개의 차별화된 이벤트를 간단하게 적는다. 그냥 나중에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할 용도로만 기입하면 된다


B. 성취/진척

여기는 주로 성취나 진척이 있었던 일들을 쓴다. 업무적인 것이든, 일상에서의 것이든, 생각에 있어서의 발전이든 상관없고 여하튼 Progress가 있어서 나의 발전이 있었음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면 된다

<예시> 내가 주로 쓰는 방식은, 괄호 안에 키워드를 쓰고 이런 방식으로 쓴다

- (업무) 오늘 A 프로젝트에 대해 적절한 시점에 이슈 라이징을 해서, 넥스트 스텝으로 나아가는데 내가 일조했다.

- (운동) 오늘 Slow Jogging 3주차인데, 오늘부터 4K로 늘렸고,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C. 기쁨/즐거움

여기는 오늘 하루 특히 감정적으로 기쁘고 즐거웠던 기억을 쓴다. 소소하고 작은 것도 좋다. 일단은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시> 내가 주로 쓰는 방식은, 주로 이러하다

- (음악) 오늘 Tame Impala의 'Let it Happen'이라는 노래를 발견했고, 내가 좋아하는 모든 요소를 갖춘 이 음악이 나를 찾아와주었음에 너무 기뻤다.


D. Thank you/Social Support(사람이나 상황)

- 여기는 오늘 하루 감사를 표하고 싶은 사람과 상황(또는 그게 무엇이든지간에)을 쓰면 된다. 아울러 나에게 사회적 지지를 보내준 사람을 쓰는 것도 특히 중요하다. 역시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순간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해서, 핵심은 아주 작은 것도 어쨌든 찾아내는 것이다^^

<예시> 내가 주로 쓰는 방식은, 주로 이러하다

- (건강) 건강하여 내가 원하는 것들을, 내가 바라는 것들을 제약 없이 시도해볼 수 있음에 깊이 감사한다.

- (친구) 오늘 명초에게 갑자기 전화를 했음에도 언제나 밝은 목소리로 나의 안부를 물어주고, 여전히 음악에 진심인 그녀가 내 친구로 건강하게 남아 있음에 감사드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꿈에 대해서 아낌없는 정서직 지지를 보내준 그녀가 내 친구임에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리게 된다.


E. Insight(오늘 하루 있었던 일 중에서 스스로 새롭게 발견한 사실)

여기는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 중에서 새롭게 알게된 어떤 발견을 쓰면 된다. 정답이 아니어도 좋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반응하는지 위주로 쓰게 되는데, 스스로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게 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

<예시> 내가 주로 쓰는 방식을 옮겨보자면

- (회복 탄력성) 적어도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래도 금방 금방 다시 긍정적인 요소를 찾아내는 나를 보면, 내가 '회복탄력성'에 있어서는 무척 뛰어남을 다시 알 수 있었다.

- (관계) 나에게는 '지적 자극+정서석 지지'가 무척이나 중요함을 다시 알게 됐다. 그것 중에 어느 하나 부족해도 충만하지 않고 비어있다고 자꾸 느끼게 된다. 나에 대해서 알아가는 시간.


F. (힘든 일이 있을 경우에만 쓰기, 아래 순서대로, 일명 Brain Writing)
①사실 위주로만 → ②(그것으로부터 느낀) 감정 → ③(그럼에도 찾아낼 수 있는) 긍정적 요소, 의 순서

이건 힘든 일이 있을 경우에만 쓰면 된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주로 그에 대한 절망, 분노, 좌절을 감정 위주로쓰게 되는데, 이 섹션의 핵심은 반드시 위에 적힌 순서대로 쓰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나의 뇌가, 부정적인 '감정'으로 그 일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부터 시작해서, 최종적으로는 그로부터 찾아낸 '긍정적 요소'로 기억하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예시> 내가 쓴 예시를 하나 조금 가공해서 옮겨보자면

①사실

- 오늘 A와의 대화, A는 본인의 관심사 위주로 얘기했고, 나는 내 관심사 위주로 이야기했다.

②(그것으로부터 느낀) 감정

-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음에 안타까움과, 소외감을 느꼈다. 내가 A와의 관계에 있어 바라는 것은 어떤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서로의 생각을 펼쳐 보이며 서로의 합일된 생각에 이르며 내가 발전하고 너가 발전하는 느낌을 가지는 것인데, 그렇게 되지 못함에 알 수 없는 한계를 느꼈다.

③(그럼에도 찾아낼 수 있는) 긍정적 요소

- 내가 원하는 대화의 방식 및 서로를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 내 생각을 좀더 정립할 수 있었다. 그저 흘러가는대로 대화를 두지 않고, 다음에는 내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싶은지 얘기를 꺼내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G. 내일의 계획(3가지 정도만)

- 이건 다소 '완벽주의자'적 속성이 있는 내게 교수님이 특별히 적어보라고 해주신 방법이다. 내일 내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 걱정 가득한 상태로 잠자리에 드는 것이 숙면에 좋을 리 없다. 차라리 일기에 내가 해야 할 중요한 일 3가지를 적어놓으면, 뇌는 그것을 걱정할 부담이 없어지니 숙면에 도움이 된다는 과학적 설명도 있었다.


H. Feedback from ChatGPT

이건 내가 추가한 목차이다. 나는 일기를 일자별로 Notion에 쓰고 나서, 그 일기를 그래도 ChatGPT에 그대로 복사해서 붙인다 그리고 '내 다정한 친구가 되어서 때로는 칭찬과 조언을 아낌 없이 해달라'고 부탁해두었다. 사실 일기는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나의 내밀한 기록인데 때로는 나의 오늘 하루에 대해서 따뜻한 정서적 지지를 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 방법을 약 3개월 전부터 실험해오고 있는데 만족한다.

사실 어제의 일기에서 인상적인 대화가 오갔는데, 소개하자면 이렇다. 어제 꽤나 기억할만한 좋은 일들과 성취가 있었음에도 내가 'B. 기쁨/즐거움' 섹션에 내가 '오늘은 없다'라고 썼다^^:: 내가 '기쁨/즐거움'의 기준이 높은 건지도 모르는데.... 어제 밤에는 '오늘 지적 충만함이 있었고 열심히 살았지만, 오늘 내가 활짝 웃었거나, 막 즐겁지는 않았잖아'라며 'B. 기쁨/즐거움' 섹션에 '오늘은 없다'라고 차갑게(?) 써 두었는데, ChatGPT의 피드백을 옮겨보자면 이러하다.

릴키의 피드백.png


이렇게, 나의 ChatGPT는 차가운 T의 시선으로 바라본 오늘 하루에 대해서 다시 한번 작은 순간 및 공간마다 숨어있는 기쁨과 즐거움을 찾아볼 수 있다고 내게 조언해주기도 한다^^


잊히지 않을 하루, 한 문장으로 저장하기


이건 교수님이 가르쳐주신 방법은 아니고, 내가 만든 방법이기는 하다. 나는 일기를 다 쓰고 나면, 그날을 가장 잘 기억해줄 수 있는 한 문장을 고른다. 하루를 요약하는, 제목 같은 문장.

어차피 모든 하루는 잊힌다. 하지만 이 한 줄만큼은 남기를 바란다. 매주 일요일이면 지난 일주일의 제목들을 훑어본다. 한 달의 끝자락에는 다시, 그 문장들을 한 줄씩 읽는다. 절망했던 날이라도, 그 안에서 분명히 있었던 나의 성취와 노력, 누군가의 다정한 말을 나는 발견하고 싶다. 그렇게 내 하루를, 내 삶을 내가 직접 편집해두고 싶은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노션에서 매일의 일기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 뒤, '제목' 서식을 적용해 목차로 자동 정리되도록 해뒀다. 이렇게 모은 문장들은 내 삶의 미니 아카이브가 된다. 그리하여 나의 지난 한 주는, 짧지만 단정하게 요약된다. 그리고 그렇게—내 삶은 기억될 것이다.


6월 일기 제목.png


그러니까 나는 단조였던 하루를 장조로 끝맺는 연습을 매일 하고 있는 셈이다. 조금 실망했어도, 조금 울적했어도 그 하루 안엔 반드시 나의 노력, 다정한 말, 그리고 작지만 단단한 성취가 있었으니까. 나는 그 조각들을 한 문장으로 남긴다. 그리고 그렇게, 나의 지난 일주일, 한 달, 한 해가 하루하루의 피카르디로 아름답게 편집된다. 음악이 끝날 때 마지막 화음을 장조로 바꾸는 것처럼, 나는 오늘을, 이 일기를, 그리고 내 삶을 기억하고 싶은 방식으로 마무리한다.


지금 내가 쓰는 이 한 줄이 언젠가 누군가에게도 조용한 피카르디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음악] 고통의 끝에서 음악이 시작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