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순간마다 음악이 건네온 새로운 세계의 메시지
사이먼 & 가펑클 (Simon & Garfunkel)의 노래 중에 'The Sound Of Silence'라는 명곡이 있다. 이 노래의 가사 중에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도입부의 이 구절이다.
Hello darkness, my old friend
안녕, 어둠(고통)이여, 나의 오래된 친구야
I've come to talk with you again
다시 너와 이야기 나누려고 왔어.
어둠과 고통은 삶에서 떨쳐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에게도 어쩌면 그것은 오래된 친구일지 모른다. 그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게 여전히 두렵지만, 나는 안다. 그 친구와의 만남은, 항상 내 인생의 더 나은 어떤 것과 반드시 연결되어져있음을. 그것을 과거로부터 배웠다. 그런데 어쩌면 고통이 내 인생의 더 나은 것과 연결되어져있다는 믿음은, 내 인생의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라는 친구가 실은 고통의 순간으로부터 온 경험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집에 외삼촌이 온다는 얘기를 들을 때면 나는 본능적으로 기도하곤 했다.
'심장이 얼음처럼 차가워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보이는 것, 들리는 것,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받지 않는 단단한 얼음처럼 그저 굳어 있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외삼촌은 엄마의 친동생이었지만, 그것 말고는 섞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어릴 적 외할머니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던 상처 때문인지 엄마를 찾아와 본인이 얼마나 힘든지를 격한 몸짓과 목소리로 호소했고, 매번 똑같은 레퍼토리 — 사업 자금만 있으면 이번에는 어떻게든 해볼 수 있다는 말—을 읊어댔다. 내 방 문을 닫아도, 귀를 막아도, 그의 목소리는 조용히 나의 세상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나는 아직도 그 시절 문틈 사이로 침범해오던 10살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두려운 공기를 기억해낼 수 있다.
엄마는 외삼촌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지만, 외삼촌은 "자형(우리 아빠)에게 말하면 되지 않냐"며 "동생인데, 가족인데, 왜 이 정도도 못 해주느냐"며 소리쳤다. 그 목소리는 너무도 당당했다. “가족이잖아.”
공감 능력은 거의 없지만 가장의 책임감과 성실함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우리 아빠, 공감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면서 거기다가 성실함과 책임감까지 갖춘 (내 얼마 안되는 좋은 특성의 모태이신) 우리 엄마. 나는 그런 부모님 아래에서 늦잠과 낮잠이 무엇인지 배우지 못한 채, 부지런함에 대한 강박을 품고 자랐던 것 같다. 그렇게 성실함과 책임감으로 무장한 부모님과, 책 읽기를 좋아하는 두 딸이 있는, 나름 평범하고 조용하면서 평온한 4인 가족이 내 어린 시절의 대표 썸네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외삼촌이 오면, 그 평화는 깨졌다. 저녁 시간에 아빠라도 있으면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그럴 때면 오히려 내 방까지 스며드는 소리의 크기는 더 커졌다. 엄마를 괴롭히는 외삼촌을 질책하는 아빠의 목소리도 어쩔 수 없이 커질 수 밖에 없었고, 그 질책과 꾸중에도 절대 작아지지 않는 외삼촌의 목소리. 소리들이 소리 위에 쌓였다. "그 삼촌 우리집에 못오게 해"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핏줄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라고 했다. 그리고 엄마는 그 외삼촌이 초등학교 3학년 딸아이에게조차 무시받는 상황이 불편했었던 것 같다. "수영아, '그 삼촌' 아니야. '외삼촌'이야. 그리고 인사는 제대로 해야하지 않겠어?"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내 방에 들어갔을 때, 내 방과 연결된 베란다에 버려져 있던 카셋트 라디오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다음에 '그 삼촌'이라는 사람이 오면 헤드폰을 쓰던지 해서, 저걸 한번 끝까지 볼륨을 높여서 들어보자. 그리고 '그 삼촌'이 온 날에 한번 실험해봤다. KBS, MBC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자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소리. “대명동에 사시는 김00님, 해지는 노을이 너무 아름답지요~” 세상 평온한 목소리의 DJ들이 생일을 축하하고, 결혼을 축하하고, 출산을 축하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삼촌'으로 인해 감히 초등학교 3학년 나이에 ‘불행’과 '불안'이 뭔지 알 것 같았는데 라디오에서는 오로지 행복한 사람들의 목소리만 들려왔다. 나는 그들의 행복을 듣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격하게 주파수 다이얼을 돌리다가 AFN(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을 위한 라디오 방송)에서 멈췄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악들이 흘러나왔다. 음악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음악과 음악 사이에 나랑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의 행복을 강제로 들어야 하는 고역은 피할 수 있었다. DJ가 뭐라 말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어를 못 알아들으니 상관없었다. 그렇게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팝 음악을 들게 됐다.
갑작스러운 침입자의 행패로 균열이 나고 무너져 내릴 것 같던 내 일상의 벽. 그 순간, 음악이라는 구원자가 나타나 나를 감싸는 든든한 벽이 되어주었다. 볼륨을 높이기만 하면 음악은 그 어떤 침입도 허락하지 않았고,
나라는 작은 세상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어도 상관없었다. AFN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소리는 마치 다른 세계가 전하는 새로운 복음 같았다. 폭발적이고, 요상하며, 멋지고, 선명한 것들의 집합. 적어도 이런 음악은, '핏줄이니까' '가족이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지'라는 이해할 수 없는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냥 맘대로 '니가 원하는대로 혼자서 줄겁던지 울던지 알아서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나는 정말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 이후, 나는 학교에 갈 때와 방과 후 친구들과 놀 때를 빼고는 항상 AFN 라디오를 들었다. 음악이 흐르면 사운드의 벽(the wall of sound)이 생긴다고 했는데, 그 벽은 때로는 외부 세상과 닿은 면은 단단하게, 나와 닿은 면은 말랑하게 나를 감쌌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과 나 사이에 안전지대가 된 것이다.
몇 년 후, 외삼촌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우리 집엔 완전한 평온이 찾아왔다. 그 때 이미 음악은 이미 나의 친구가 된 이후였다. 이후 학창시절을 지나 대학 방송국의 DJ가 되고, 임진모 선생님을 만나 음악평론가를 꿈꾸고, 지금은 음악이 나의 직업이 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은 음악을 알아가는 것이라 하겠다. 결국 지금 내 삶의 가장 큰 기쁨이 된 것의 시작은, 생각해보면, 고통과 불행이었더라. 그리고 그 시작은 고통이었지만 이제 그 시작의 정서를 완전히 벗어나서, 나는 세상 모든 다채로운 정서를 음악으로부터 느끼는 삶을 살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이상하게 음악은 항상 고통과 불안의 순간과 맞닿아 있다. 클래식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수원에 있는 지금의 회사를 다니기 위해서 나는, 그전에 대학로에서 살던 집을 이사해야만 했다. 수원으로 이사하기는 싫어서 회사 셔틀버스가 다니는 서울 강남의 논현동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2015년도에 이사한 빌라는 위치도 좋았고 깔끔했으며 여러모로 자부심이 드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빌라는 적어도 당시 내 나이의 직장인이 전세로 살기에는 상당히 고액이었고 이사를 결정한 날, 나는 스스로 우쭐했었다. '오~ 내가 마침내 강남의 (적어도 내 기준에서의) 이 고급빌라에서 살 수 있을만큼 나 성공했구나' 뭔가 고상한 삶을 살 것 같은 주인과 이웃 주민들의 분위기까지. 뭔가 행복이 시작될 것 같은 분위기.
그런데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 이사를 한 첫 날, 낯설지만 설레이는 그 빌라에서 잠이 들었던 나는 새벽에 깨고야 말았다. 누군가의 비명과, 서로를 때리는 소리, 가구가 부서지고, 머리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즉 남녀가 격하게 싸우는 소리였다. 부부싸움인가? 아니면 뭐지?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고, 두려움과 정의감이 뒤섞여서 경찰에 신고까지 했는데, 놀라운 건 경찰서에서도 심드렁하게 "아~301호 또 신고 들어왔네...이미 출동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폭력의 소리가 현실이 되어 내 방까지 파고들어왔다. 귀를 막고, 몸을 오그리고, 이불 속에서 숨을 죽였지만 그 소리는 벽을 넘어 나를 덮쳤다. 심지어 기가 찼던 것은 경찰이 와서 연행된 그 남자를 창문을 열고 잠깐 훔쳐봤는데, 문신을 하고 있더라는. 하..세상에...
도대체 이게 무슨 영문인가 싶었고, 안전과 평화가 최우선이어야 할 나의 집에서, 그리고 내 평생 모은 돈을 들여서 이사온 나의 보금자리의 바로 옆집에 저런 류의 남자가 산다니 너무나 충격이었다. 어떻게 저런 인간이 살 수가 있지, 그리고 이것이 계속 이어지면 어떡하지? 두려움과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빌라 주인이신 할머니를 찾아가서 물었다. “할머니, 옆집 계약은 언제까지인가요? 제가 어제 뭔가 심하게 싸우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아요” 다행히 너무나 인자하셨던 할머니는 "아가씨, 미안해요, 일주일에 한번 남자가 집에 찾아오는 것 같은데 그때마다 큰소리가 나요. 저도 말하고는 있는데...제가 한번더 말해보겠습니다만, 조금만 참아줄래요?" "아....네...." 할머니가 너무 좋은 분이긴 하셨는데, 전세계약을 2년하고 들어온 지, 이제 이틀째였다. 방법이 없었다. 견뎌야 한다. 어떻게든.
불행 중 다행인걸까? 정말로 다행이었던 건, 그 이상한 문신을 한 자가, 일주일에 이틀 즉, 금요일 밤과 토요일 밤에만 찾아온다는 거였다. 아, 그때만 친구 집에 피신하거나 아니면 그때만 방법을 찾으면 되겠구나. 하느님은 늘 나에게 완전한 고통을 주시지는 않는구나. 방법을 찾아보자.
그러다 문득, 그토록 어렵고, 그토록 지루하기만 했던 클래식 음악을 떠올렸다. 헨델, 모차르트, 쇼팽, 슈만.
그 전에 몇년 동안을 클래식과 친구가 되려고 공부할 때, 평온하지만 지루하고 길어서 도저히 끝까지 들을 수 없을 것 같던 그 음악들. 그 음악들이 어쩌면 이 시간을 견디게 해주지 않을까? 그들이 남긴 음표들이 내게는 마치 구원의 주문처럼 느껴졌다. 토요일 새벽에 어쩌면 큰소리가 날 수도 있으니, 나는 금요일 밤 11시 즉, 공포가 엄습할 시간을 대비해서 이어폰을 끼고 클래식을 재생하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이 음악은 몇백 년을 지나 지금 여기, 나를 지키기 위해 마침내 도착했다.”
그토록 멀게만 느껴졌던 클래식은 내 절박함과 비장함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아침까지, 나는 절대 스탑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클래식 음악은 나를 지켜주는 보이지 않는 벽이 되어주었고,
문신한 남자의 고함은 점점 더 멀어졌다. 그렇게 3개월 정도가 지났나? 그 빌라 앞에 이삿짐 차가 도착했다. 그들이 떠났다. 공포도 함께 사라졌다. 나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클래식이 내게 오기 위해 이런 시간이 필요했던 걸까. 왜 음악은 늘 이렇게 힘들게, 이토록 아픈 시간을 지나서야 나를 찾아오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