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결합된 음악을 이길 수 있을까?

별 5개보다 더 위대한 것

by KeepWhatMovesMe


"별 5개의 기준은 뭐야?"


J가 물었다. 우리는 내가 정리해둔 음악 앨범 리스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별 4개와 별 5개로 나뉜 그 리스트를.


"별 4개부터는 '내' 음악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해. 그리고 별 5개는 말이야... 음,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라도 들을 수 있는, 여하튼 그 정도의 음악이라고 생각하면 돼."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생각했다. 내가 별 5개(★★★★★)를 선사한 음악들은 어떤 특징이 있는 것일까?


얼마전 뮤지션 프린스에 관한 영상을 유튜브에서 검색하다가 영화 <귀여운 여인(Pretty Woman)> 의 한 장면을 보게 됐다. 욕조에서 거품목욕을 하던 줄리아 로버츠가 헤드폰을 끼고 프린스의 'Kiss'를 코믹하게 따라 부른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리처드 기어에게 그녀가 묻는다. "프린스 좋아해요?" 리차드 기어가 답한다. "인생보다 더(More than life itself)"


'인생보다 더'


그래, 별 5개는 그런 음악이어야 하는 걸까?




나는 노션(Notion)에 내가 들었던 팝음악(가요 포함)과, 클래식 음악을 각각 앨범 단위 및 작품 단위로 기록해두고 있는데, 팝음악을 정리해둔 페이지에서 별5개라고 표시해둔 앨범들을 찾아봤다. 왜 이 앨범들은 별5개지?


✔ Marvin Gaye의 <What's Going On>(1971)

이 앨범이 별 5개인 이유를 '진정성에 대한 완전한 설득'이라 말할 수 있을까? 마빈 게이의 부드럽고 영혼 가득한 보컬이 베트남 전쟁, 환경 문제, 빈곤 등의 사회적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이런 정치적 메시지조차도 선동이 아니라 음악과 기도로 가능하다는 것이 그대로 느껴지는 앨범이었다.


✔ The Go-Betweens의 <16 Lovers Lane>(1988)

이 앨범이 별 5개인 것은 '발견의 기쁨' 때문일 것이다. 찰랑거리는 기타 사운드를 무척 좋아하는데, 이것을 전문 용어로 쟁글링 사운드(Jangling Sound)라고 칭한다. 쟁글링 사운드의 숨은 보석을 어렵게 찾아냈고, 심지어 거의 모든 곡이 좋았으니, 남들은 모르는 엄청난 명반을 알게 된 것에 대한 감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Tame Impala의 <Currents>(2015)

그런 말이 있다. '음반이든 연애 상대든, 우리는 나를 가장 나답게 느끼게 해주는 대상과 사랑에 빠진다'라고. 그 말에 따르면 이 음악은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앨범일 것이다. 그래서 별 5개였다.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에서 다프트 펑크(Daft Punk)가 빠지지 않고, 가장 좋아하는 장르가 단연코 '드림팝'인데, 이 밴드 사운드의 정체성이 일렉트로닉+레트로+드림팝이었으니 이 밴드의 음악이야말로 가장 나다운 음악이었던 거다.



그런데, 여기 Pulp의 <A Different Class>(1995)가 있다.


역시나 별 5개이지만..아니다, 이 앨범은 별5개일 수가 없다. 저 앨범들과 같은 선상에 둘 수 없다. 별6개를 주어야 할까? 왜지?


이 앨범은 1990년대에도, 2000년대와, 2010년대를 지나 2020년대에도 항상 내 곁에 있었다. 이 음악을 들었던 시간들이 다 겹쳐 있어서, 이 음악은 그저 '이 음악'으로만 별개로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지나온 시간들과 전부 결합되어 있어서,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고, 음악 그 자체만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음악을 플레이하는 순간, 이 음악을 들었던 그때의 시간, 사람, 추억 등등이 함께 재생된다고 할까?


이 앨범을 처음 들은 것은 아마 90년대 말, 임진모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Common People을 처음 들었을 때를 떠올린다https://youtu.be/yuTMWgOduFM?si=DEpgDX6IoVvKYKQY

'Common People'을 처음 들었을 때를 기억한다. 무언가 뿅뿅거리는 전자음으로 시작해서, 점차 고조되다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이 느낌. 곡 전체를 감싸는 신시사이저의 사운드스케이프에 이상하게 마음이 고양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보컬 자비스 코커(Jarvis Cocker)가 노래를 부르는 건지 중얼거리는 건지 모르겠는데, 중간중간 숨을 들이쉬기도 하고 내쉬기도 하면서 뭔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느낌이었다. 이 노래의 메시지가 뭔지 몰랐지만, 뭔가 굉장히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고 호소하는 듯한 느낌. 그리고 결국 힘들여서 해석해낸 이 노래의 가사가 사회비판이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래 이렇게 감각적인데 이렇게 지성적이었어!


'Something Changed'는 또 어떤가.

https://youtu.be/EFSdf_VeYG0?si=WRfbe92IwrRgNCNg

Do you believe that there's someone up above?
And does he have a timetable directing acts of love?
Why did I write this song on that one day?
Why did you touch my hand and softly say
"Stop asking questions that don't matter anyway
Just give us a kiss to celebrate here today something changed?"

너는 마치 해가 떠오르듯 누군가 내 삶에서 갑작스럽게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을 믿니?
저 하늘 위에 있는 그는 정말로 시간표가 있었던 것 아닐까? 사랑만이 기록된 어떤 시간표를 말이야.
왜 나는, 바로 그 날, 그래, 바로 그 날에 이 노래를 썼던 것일까?
왜 너는 그렇게나 부드럽게 내 손을 만지며 말했던 거니?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말들은 이제 그만 집어치워.
그냥 내게 키스해 줘, 오늘 이렇게나 무언가 변화된 여기 이곳, 이 날을 축하하는 키스를 말이야"


사회를 비판하면서, 사랑의 우연성을 이야기하는 이 음악. 그렇게 이성적이고 지각 있으면서도 낭만을 잃지 않는 이 음악. 브릿팝 안에서도 가장 댄서블했고 경쾌했던 이 음악. 이것은 내가 살고 싶은 삶 자체였고 그렇게 그 앨범은 나의 것이 되었다.

그래, 맞아. 이건 나야.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것과 사랑에 빠진다고 했지. 그렇게 이 앨범은 자그마치 21세기가 되기도 전에,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앨범이 된 것이다.


그리고 20대를 지나, 30대를 지나, 40대가 되어서도 이 음악은 나의 어떤 시기마다 내 곁에 있어 주었다. 몇년간 이들의 음악을 듣지 않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사를 갈 때마다, 내 거실의 정중앙. 가장 아끼는 CD들을 모아놓은 영역 중에서도 가장 중앙에 이 CD가 있었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몇 년을 듣지 않아도 여전히 생각나고, 다시 들어도 여전히 좋고, 여전히 20대가 떠오르는 앨범이라고. 가끔 생각한다.20대의 내가 지향했던 그 요소들이, '나'라고 말했던 그 요소들이 여전히 내게 있겠지? 그렇게 나는 살아가고 있는 거겠지? 음악은 그렇게 시간과 함께 쌓였다.


이건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https://youtu.be/5AYAfLmRi9Q?si=gODZ5HBmnINgMK-1

이번 추석 명절에 KBS에서 방영한 <KBS 대기획 - 조용필, 이 순간을 영원히>를 봤다. 30대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75세의 위대한 이 가수. 그리고 이 위대한 가수와 인생을 산 이들이 나왔다.

타국으로 이민을 가서 도전을 시작했지만 결코 쉽지 않은 매일을, 조용필의 노래 "꿈" 이 세상 어디가 늪인지, 어디가 숲인지...'라는 가사를 들으며 견뎌낸 어느 팬.

매일 조용필을 쫓아다니며 공부를 소홀히 하던 어느 팬이, 조용필이 '제 팬은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듣고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해 지금은 교직에 몸을 담은 선생님이 되었고, 지금은 남편과 딸들까지도 조용필의 팬이 되어, 해마다 조용필의 콘서트가 열리는 도시로 가족여행을 떠나는 어떤 팬.

심지어 아이를 출산할 때도 '용필 오빠'의 음악을 들으며 그 고통을 이겨냈다는 팬도 있었다. "남편은 그때 같이 계셨나요?"라는 제작진의 질문에, "남편은 별로 도움 안 되던데요"라던 너무나 솔직하고 유쾌한 답변


이런 이들에게야말로 그에 대한 그리고 그의 음악에 대한 애정을 감히 '인생보다 더'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결국 시간의 힘이었다. 시간과 결합된 음악의 힘이었다.


90년대에 그 음악을 듣고 위로받아 조금 더 강해진 내가, 30대가 되어 다시 그 음악의 추억으로 시간을 살고, 그렇게 단단해지고 성숙해진 나. 그 시간을 견뎌온 나에 대한 애정, 그리고 그 곁에 언제나 있어준 음악에 대한 사랑.


별 5개는 그저 음악의 완성도만은 아니었다.


별 5개보다 더 위대한 것은, 그 음악과 함께 살아온 시간의 무게였다.


이전 07화나는 확실한 게 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