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日. 조잡스러운 성향이란

아수라백작으로 살아남기

by 구 벨

"분명히 1시간이면 될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 벽시계와 눈이 마주친 구 씨는 깜짝 놀란다.

새해를 맞이하여 호기롭게 방청소를 한다고 평소에 하지도 않던 일을 벌인 것이 화근이었다.

구 씨의 방은 현재 큰 바구니 여러 개에 각각 가득 찬 물건들로 인해 포화 상태이다.

"뭔 놈의 방이 2시간을 정리해도 끝이 안 나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구 씨는 정리에 다시 박차를 가하기 위해 쪼그려 앉았던 몸을 일으킨다.

순간적으로 핑 도는 눈앞을 잠시 진정시키다가 정리가 완료된 물건들에 시선이 꽂힌다.


가득 찬 바구니만큼 물건의 종류도 다양하다.

리코더, 오카리나, 드럼스틱, 하모니카, 아코디언, 단소, 우쿨렐레와 같은 악기들은 한 때 구 씨가 푹 빠져 연주했던 곡들을 떠오르게 한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한지, 금박지, 반짝이, 꽃무늬 등 다양한 재질의 색종이들은 한 때 꽂혀있었던 종이접기를 떠오르게 한다.

가장 구석에 탑을 세워놓은 '에픽하이'와 '다이나믹 듀오' 등 유명 힙합 뮤지션들의 CD 앨범들은 구 씨가 지금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음악 장르인 힙합(hiphop)에 빠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CD 바로 옆에는 책들이 질세라 줄줄이 쌓여 있는데, 이들은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던 구 씨에게 5년 전 처음으로 독서라는 활동의 묘미를 알게 해 준 고마운 존재들이다.

이번에는 허리를 수그려 책상 아래를 본다.

전동연필 깎기, 전동지우개, 연필깍지, 다양한 굵기와 모양의 붓, 팔레트, 스케치북, 마카, 색연필 등 미술도구들이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구 씨는 한 때 즐겨 그렸던 애니메이션 원피스(One-Piece)의 '이반 코프'라는 캐릭터가 떠오른다.

애니메이션 원피스 ‘이반 코프’. 화려한 외형과 윙크가 주 무기이다.
아유 조잡스러워! 아직도 정리하는 거니?

구 씨의 아련한 추억회상을 빨리 감기 못지않게 후루룩 날아가게 하는 이 목소리는 구 씨의 어머니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녀 자체가 굉장한 깔끔쟁이이자 한 우물 파기의 칭송자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정당하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딸 구 씨는 한 우물파기에는 젬병이오, 두 우물 세 우물을 넘어 기본 우물 10개 보유자라는 스펙을 자랑하기 때문에 늘 이렇게 어머니의 핀잔을 들어야 하는 운명이다.


사실, 구 씨는 물건만 다채롭게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취향과 취미, 음식 등도 좋아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으며 길다면 6개월 단위로, 짧으면 한 달 단위로 휙휙 바뀐다.

지난달에는 꼬불꼬불 라면처럼 신명 나게 머리를 볶았지만, 이번 달에는 그새 질려서 매직으로 쫙쫙 펴대는 식이다.

즉, 한마디로 말하면 구 씨는 일상의 모든 면에서 꾸준함과 통일성이 없고, 산만하며 변덕스럽다.

그리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를 단점이자 반드시 고쳐야 할 점이라고 생각하며 괴로워했다.

심지어 구 씨 스스로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가 아닌가 하고 돌팔이 자가진단도 내렸으니 그 걱정의 정도가 활자로만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물론, ADHD는 아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구 씨가 살다 보니

이 아수라백작 같음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더라.

특히, 요즘처럼 변화가 잦고 예측 불가능한 사회에서 스스로가 '올라운더(All-rounder)'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이돌을 한 번이라도 좋아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는 '다재다능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그룹 멤버 중 랩, 댄스, 노래 포지션이 모두 가능할 경우에 이렇게 일컫곤 한다.

비슷한 말로 멀티플레이어(multi player) 정도가 있겠다.


실제로, 구 씨는 직장에서 어떤 업무를 맡게 되든 누구와 함께 일을 하든 자신의 색깔을 쉽게 바꾼다.

즉, 수용성이 높다는 것이다.

낯선 환경에서도, 특히 급격한 변화가 필요할 때일수록 이를 피부로 잘 느끼고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이는 작년 초에 구 씨가 중도 퇴사를 하고, 새로운 직장에서 그동안의 경력과는 전혀 다른 업무와 낯선 동료들에게 적응을 해야 되었을 때 발휘되었다. 조직에 비어있는 암묵적인 포지션이 무엇이며 구 씨 본인이 그 역할을 하면 쉽게 적응할 수 있겠다는 포인트를 잡아내어 잘 작용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개조한 것이다.

또, 이 성향은 순발력도 덤으로 제공한다.

구 씨의 머릿속에 다양한 분야의 경험이 참고자료로 항시 대기 중이기 때문에 당황스러운 상황을 대면하더라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효과적일지 지도가 그려지는 것이다.

한 사례로, 현재 구 씨는 대학에서 교직원으로 근무 중인데 대학 특성상 성과공유회와 같은 행사가 잦은 편이다. 이 성과공유회 행사에서 구 씨는 행사날 당일 급작스럽게 사회자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리허설을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구 씨가 과거에 힙합을 좋아하였고, 아주 잠깐이었지만 교내 힙합 동아리를 하며 자작곡을 끄적였던 경험 덕분에 라임(rhyme)이 살아있는 멘트가 바로바로 떠올라서 진행에 적당한 재미를 주면서 안정적으로 행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실제로 구 씨는 이 날 직장 동료들로부터 외부에서 섭외한 전문사회자 같았다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다양한 분야에서의 경험과 통일성 없는 중구난방식 성향은 창의적 사고를 촉진한다.

참고자료가 종잡을 수 없이 널려있기에 이들을 통합적으로 함께 작동시킬 때 재밌는 상황이 빚어지기도 하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는 감상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딱히 골머리를 싸매지 않아도 툭툭 떠오르는 요소들이 있다.


마지막으로,

도전을 겁내지 않는다.

이것저것 해본 경험이 있기에 뭘 하든 처음이면 실수를 많이 할 테고, 미숙할 것도 어느 정도 예측이 되며 이를 연마해 가는 과정에서 성취감이 주는 쾌락을 알고 있기에 무엇이든 잘 도전하는 편이다.

구 씨가 지금처럼 브런치 작가로서 글을 연재하는

것도 처음부터 유명 작가를 목표로 했다면 절대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이킷 수나 댓글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롭게 문장력을 기를 수 있는 오픈된 글짓기 연습장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즐기고 있다.


흔히들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일만(10,000)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동일한 제목의 베스트셀러 책도 있을 정도로 우직함과 꾸준함은 중요한 미덕이기에 구 씨는 이를 애써 부정하고 싶진 않다.


다만,


구 씨처럼 얕지만 넓은 지식과 경험으로 무장한 중구난방 통일성 없는 아수라백작들도 사회에서 한몫을 넘어 두몫, 세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단독으로는 존재할 수 없기에, 우리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한 우물만 파는 인간과 여러 우물을 파놓은 구 씨 같은 인간들이 서로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는 게 효율적이다.

이쯤 되니 구 씨는 세상이 마치 다양한 장르의 요리들이 소개되어 있는 뷔페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는 이곳에서 샐러드나 김밥만 먹고 있을게 아니라, 미지의 음식들도 한 번씩은 먹어보겠다고 다짐한다.


‘이번엔 식물을 한번 키워볼까나’

구 씨는 이 또한 얼마나 유지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제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정리하느라 텅 비어버린 허전한 책상과 그 주변이 구 씨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작은 보타닉 가든으로 변하고 있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이미지,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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