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날도 아니지만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끝자락이 돼서야 추위를 몰아주는 겨울이 구 씨는 얄밉다.
뭐 별수 있나.
허공에 흩어지는 입김을 애써 외면하며
목도리에 파묻힌 목을 더 한껏 움츠리고 걸을 뿐이다.
11분 9 정류장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은 배차간격에
버스 전광판을 넙치처럼 노려보다가
이 추운 날 뭐가 그리 재밌는지
옆에서 깔깔대는 커플에게
괜히 심술궂은 눈빛을 옮긴다.
‘어, 꽃이다.’
질리도록 흑색과 백색뿐인 거리에서 권태로움을 느낄 때 즈음, 한아름의 연보랏빛 스토크와
구 씨의 눈이 마주치고 만다.
‘그래, 이건 계시다.
꽃을 사라는 계시.‘
곧, 구 씨는 버스를 기다리던 것도 잊은 채
홀린 듯 꽃집으로 걸어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어서 오세요
시린 손을 마주 비비며 꽃집 문을 밀고 들어서자마자
주인의 경쾌한 인사와 함께
달큼한 꽃내음이 구 씨를 에워싼다.
아까 눈 마주친 스토크뿐만 아니라
안개꽃, 장미, 라넌큘러스, 거베라, 캄파눌라 등이
이 겨울에도 각자의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다.
찾으시는 꽃 있으세요?
형형색색의 생명들과 교감을 나누며
허파 깊은 곳까지
간질간질 해질 때 즈음
훅 들어온 주인의 물음이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전문가에게 추천을 받고자
구 씨는 용기를 내어 말한다.
“어.. 그 저 꽃다발 만들려고요.
2만 원 이내로 할 수 있을까요?”
이어 주인이 몇 번 이 꽃 저 꽃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고
곁다리로 유칼리툽스 이파리를 넣어주네 마네
하다 보면
그 자리에서 뚝딱
탐스러운 꽃다발이 완성된다.
오늘 무슨 날이신가 봐요?
꽃을 건네며 주인이 말한다.
아니다.
이 꽃은 구 씨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화병에 고이 모셔질 몸이다.
“아뇨, 그냥 저를 위한 선물이에요.”
언제부터였을까.
특별한 날이 아닌 평범한 일상에서
더 자주 꽃을 사게 된 것이.
그들의 싱그러움에 기대어
살아가게 된 것이.
꽃은 위로를 건넨다.
꽃은 용기를 준다.
꽃은 긍정을 노래한다.
꽃은 희망을 보여준다.
꽃은 기쁨을 표현한다.
꽃은 감사를 느끼게 한다.
꽃은 축하를 더해준다.
꽃은 결실을 맺어준다.
꽃은 인내를 경험하게 한다.
꽃은 포용해 준다.
꽃은 환희를 나타낸다.
꽃은 설렘을 자아낸다.
꽃은 감동을 빚어낸다.
꽃은 응원해 준다.
꽃은 평온을 선사한다.
꽃은 다정함을 보인다.
꽃은 그리움을 준다.
꽃은 열망을 느끼도록 한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식물‘일 수 있지만
적어도 구 씨에게는
둥둥 떠다니던 단어들이
필요한 순간에 발현되는 실체가 된다.
우리 몸속에 부족한 영양소가 있다면
해당 영양소가 포함된 음식을 더 열렬히 섭취하듯,
적재적소에 꽃이라는 형태로 수혈하는 것이다.
어쩌면, 꽃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가장 눈부신 모습으로 피워낸
기적 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특별한 날에 꽃을 선물하는 게 아닐까.
아무 날도 아닌 아무 일에 아무 꽃을 사면서
구 씨는 생각한다.
그리고 다가오는 봄에는
화사한 꽃병 하나를 장만하리라
다짐하며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이미지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