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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비나 Jul 26. 2023

아이가 없다면 모든 게 쉬워지는 마법

비가 오던 그날

둘째 네모와 병원 진료를 보고 나오는데 장대비가 쏟아졌다. 건물 밖을 한 발자국만 나서도 노오란 콧물이 두 콧구멍을 꽉 막고 있는 네모가 홀딱 젖을 것 같아 건물 밖을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우리 모녀 옆을 지나가며 우산을 활짝 펼치며 당당히 나간다. 그 우산을 펼치며 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는 우산 없지? 나는 우산 있다~!'


세 살짜리 네모에게 괜스레 말을 걸어 본다.

"네모야~ 우리 어떡하지? 엄마가 안고 뛰어가볼까? 아니다. 네모 감기 걸려서 더 심해지겠다. 아빠한테 전화해볼까?"


"오빠! 여기 이비인후과 건물인데 못 나가고 있어. 지금 오고 있어? 얼마나 걸려?"

"15분 정도 기다려야 할 텐데~"

"알았어. 네모랑 기다릴게."


와... 15분이 이렇게 길었었나?

유튜브 영상 하나 보면 그냥 가던 시간이 참 느리게도 갔다.


세 살짜리와 대책 없이 뭔가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애가 없으면 못 느꼈을 또 다른 차원의 '초조함'이다. 아이가 갑자기 보챌 수도 있고, 자꾸 내 뜻과는 다르게 여기 가자고, 저기 가자고 하기도 한다. ADHD가 있는 세모와 기다리는 일의 어려움은 여기 나열하기도 어렵다. 아이를 낳고 나서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기다리는 것'이 됐다. 물론, 거기엔 전제 조건이 있다. '애만 없다면' 난 맛집을 위해 2시간도 기다릴 수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남편이 도착했다.

우리의 구세주. 남편이 모처럼 반가웠다.


"네모야, 아빠 왔다! 우리 우산 쓰고 이제 걸어가 볼까?"


남편이 건넨 우산은 아주 튼튼한, 호텔에서 빌릴 법한 긴 검은색 장우산이었다. 그때부터 난 고민이 시작됐다. 이 우산을 아이를 안고 들 것인가, 아니면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나란히 걸으며 우산을 쓸 것인가.


고작 키가 1m도 안 되는 아이와 우산을 쓰고 가는 일은 참 어렵다.

14kg 가까운 아이를 한 손으로 안고 한 손은 저 무거운 장우산을 들어야 한다.

손을 잡고 나란히 걷자니 이런 폭우에는 아이가 결국 다 젖을 것만 같다. 그리고 세 살의 걸음은 또 얼마나 느린가... 네모의 걸음 속도에 맞추자니 5분 만에 달려갈 거리를 20분이 걸려 걸어가야 한다.


그리고 세 살 아이는 앞만 보고 걷지 않는다. 자기 발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신기해 10초 바라보다가 옆에 지나가는 노란 버스를 한 번 가리키며 소리 질러줘야 하며, 지나가는 할머니의 애정 가득한 눈 맞춤에 손을 흔들며 호응도 해줘야 한다. 그런 아이의 마음을 다 들어주다가는 그냥 비가 그쳐버릴 것 같았다.


결국 안고 내 두 팔은 없다고 생각하며 데리고 빨리 걸어갔다.

그러다가 도저히 내 팔이 버티질 못할 것 같아 아이를 내려놓고 걸어갔다.

네모의 머리 위로 굵은 빗방울이 우산 끝에 매달린 빗방울이 떨어졌다.


똑.


"엄마! 비 맞아요! 안아 주세요!"

'미안, 네모야. 엄마의 팔이 이러다가 널 떨어뜨릴 것만 같아...'


전략 변경.

"네모야, 비는 얼마나 재밌는 건데! 이것 봐. 첨벙첨벙! 물 웅덩이야!"

"비는 재밌는 거야?"


네모는 갑자기 비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는지 첨벙첨벙 물 웅덩이를 온 마음으로 즐겼다.

"엄마! 비는 재밌는 거예요!"


그렇게 우린 무사히 우리의 차까지 잘 도착했다.



아이가 없다면,

기다리는 일도,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일도 참 쉬웠을 텐데.

아이를 갖기 전엔 병원에서 1시간을 대기하는 일은 한숨이 나오는 일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엔 우산을 쓰고 비를 피하는 길이 고작 몇 초여도 짜증이 났다.


나의 아이들을 키우면서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소아과에서 대기하는 일도, 우산을 기다려야 하는 시간들도, 빗 속을 걷는 일마저도.


그런데 아이가 있어보니 알겠다.

아이가 없으면 1시간을 기다리는 일도 자유 시간이고, 우산을 쓰고 걷는 일마저도 천천히 장대비의 소리를 시원하다고 느낄 수 있고, 비가 내릴 때 냄새마저도 좋단 것을.


정말 아이가 없을 땐 모든 게 참 쉬워지는 마법.

반전은 아이를 키워야만 알 수 있는 마법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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