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류는 K팝, 김치, 그리고 '7세 고시'?
2025년 2월, <7세 고시, 누구를 위한 시험인가>라는 제목의 추적 60분 다큐가 방송됐다. 캐나다에서 학원이 없는 삶을 살게 된 우리가 캐나다에서 이 다큐를 보니 느낌이 더욱 이상했다. 마치 잠시 바쁜 일상을 두고 휴양지에 나와 있는데 부장님이 카톡을 보내는 느낌이랄까.
'이거 잊지 않고 있지? 다녀오면 잊지 말고 해야 해.'
'맞다. 잊고 있었네. 한국 가면 아이들은 다시 한국 교육 시스템에 적응해야 한다는 걸.'
7세 고시가 얼마나 아이들에게 가혹한 현상인지 공교육 교사로서, ADHD 아이의 엄마로서 더욱 체감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그게 한국 교육의 현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우린 그곳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
공원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이제 겨울이 좀 지나갔지만 여전히 추운 날이었다. 가끔 봄이 올랑 말랑 하던 그런 날씨에 캐나다 엄마와 스몰톡을 하게 됐다.
"우리는 한국에서 왔어요. 캐나다살이 1년 반 해보려고요."
"제 직장 동료가 한국인이에요. 그래서 한국 음식이나 문화에 관심도 많아요. 김치도 정말 좋아해요."
그녀는 내게 김치 맛집까지 소개해주었다. 역시나 친절한 캐나다인.
"Oh! 내가 유튜브에서 한국 아이들에 대한 다큐를 봤어요. 어린아이들이 시험을 보려고 줄을 엄청 서 있는데 하기 싫어서 막 울고 그런 다큐였는데." 그녀가 말한 다큐는 바로 <7세 고시>였다.
"두유 노 싸이?"
12년 전, 중독성 있는 멜로디와 '말춤'으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다. KPOP을 알리려는 시도는 늘 있었지만 역대급 흥행을 했던 것은 정말 강남스타일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우리는 외국인을 만나면 우리나라의 '이것'을 아냐는 질문으로 대화의 물꼬를 트곤 했었다.
"두유 노 김치?"
"두유 노 싸이?"
그런데 이젠 <7세 고시>와 같은 한국의 조기 교육, 사교육 과잉이 다른 나라 사람들이 알 정도라니.
"What do you think?" 그녀의 생각을 물었다.
"Kids need to be kids." 아이는 아이다워야지. "아이에게 도전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 선은 있어야 하지 않아?"
그녀의 반응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녀의 의견이 정상적인 반응이기도 했고, 나 역시 너무 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7세 고시>를 보고 나면 대부분 엄마들을 비난한다. 대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교사일 땐 몰랐던 부모의 마음을 부모가 되니 알게 된 것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부모의 불안감, 아이에 대한 욕심, 내 아이가 영재일지도 모른다는 허황된 기대감들 같은 것도 부모이기에 한 번쯤은 품어보는 감정들이다.
거기에 "상위권이 아니면 실패"라는 사회 분위기가 더해지면,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부모들이 어디 있을까. 아이가 시켰는데 '잘' 하기까지 하면 그 욕심은 끝도 없이 나아갈 것이 분명하다. 입시를 치르고 인서울 대학을 가야 그래도 사람 대접받고 먹고살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다. 대학을 나와 대기업을 들어가고 가정을 꾸리고 최대한 오래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며 살아가는 삶이 정답인 것처럼 서로 답지를 공유한다.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제자들을 고등학교를 보내보니 삶에 정답은 없다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됐다. '뭐 먹고 살라나' 했던 제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다 하며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꼭 공부가 아니어도 삶은 계속되기에, 누구보다 아이들이 잘 되길 바라는 건 바로 자기 자신이기에 아이들은 각자의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의대 열풍, 영어유치원, 7세 고시, 4세 고시까지 나오는 판에 누군가 달리면 나도 달려야 할 것 같고, 그 끝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달려가는 곳이 어딘지 모르지만 일단 달리고 보자는 식의 선택들이 과연 옳은 것인가 의문이 들곤 한다.
캐나다에서 7세 아이들은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가는 나이이다. 아이들은 그때 모국어인 영어를 더듬더듬 읽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3학년을 다닌 우리 아이는 캐나다 학교에서 책가방에 책을 들고 다닌 적이 없었다. 매일 recess(휴식 시간)에 나가서 아이들이랑 무슨 스포츠를 하고 놀지 고민하는 게 세모의 숙제였다. 중학교 3학년까지도 아이들은 5시, 6시면 여름엔 축구와 야구(남학생, 여학생 모두), 겨울엔 하키를 하며, 이 세상에 태어난 특권을 누리듯 부모의 품 안에서 마음껏 도전하고 실패해 본다.
물론 이곳에서도 아이 교육에 열을 올리는 부모들이 있다. 내가 발견한 차이점이 있다면, 캐나다에서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경우에 사교육을 시키고, 한국의 경우에는 하위권 아이들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지 않은 경우에도 노후자금을 써서까지 시킨다는 것이다.
이곳, 캐나다의 아이들은 '꿈을 꿀 자유'가 있다.
어떤 꿈이든 존중받는 자유.
그리고 '꿈을 꿀 수 있는 시간'이 있다.
형광등 아래에 책상에 앉아만 있기보다 친구들을 만나고 나만이 잘하는 것, 내 운명이 부르는 것을 찾을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
부모 역시 거대한 사회, 문화, 제도 속 작은 개인일지 모른다. 우리가 자라온 환경이 그랬기에 우리도 모르게 대물림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에겐 부모가 우주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나'라는 인간 하나가 중심을 어딘가에 잘 잡아준다면, 아이는 그 중심이 우주로 알고 자란다.
나는 캐나다에서 그 중심을 잡고 돌아가겠다.
(단호한 결의다.)
내 아이의 우주를 바꾸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