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기지에 짓밟힌 오키나와의 비극은 현재 진행형이다.

사회고발, 추리, 그리고 서스펜스 드라마 <펜스(2023)>

by 김한샘

[펜스(Fence, フェンス), 채널 WOWOW에서 2023년 방영, 국내에서는 티빙(TVING)에서 시청 가능.]


2002년 월드컵의 열기가 한참이었던 그때, 다른 의미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 바로 미군 장갑차에 의해 여자 중학생 두 명이 압사당했던, 일명 ‘효순이 미선이 사건’. 미국 국적의 그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우리나라 사법부의 재판권과 조사 권리는 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따라 그 한계가 매우 명확했다. 심지어 관련 피의자인 미군 병사들에 대해 미군 군사법원은 무죄 평결을 결정하였다. 왜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 우리나라 국적의 어린 학생들이 억울한 죽임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처벌할 수 없었던 걸까.


상술한 것과 아주 동일한 사건은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시각으로 접근해 볼 수 있는 사건이 이 드라마의, 일본의 오키나와에서도 일어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오키나와라는 곳에 대해서 잘 몰랐다. 유일하게 알고 있는 점이라면 동아시아에서 유명한 휴양지, 하와이와 비슷한 분위기를 띠고 있는 이국적인 섬이라는 것. 마치 우리나라의 제주도를 연상케 하는 곳. 그래서인지 오키나와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슬픈 역사를 가진 섬이다. 섬이라는 공간은 왜일까, 필연적으로 비극을 피해 갈 수 없는 곳이다.


이 드라마의 제목인 <펜스>, 영어로 Fence. 공간의 경계를 지어 막는 울타리를 의미한다. 그 공간은 바로 오키나와 내 주둔하고 있는 미군 기지이다. 일본과 미국을 분리하는 이 철조망 울타리 너머는 이국(異國)이다. 국내법을 적용할 수 없다. 물리적으로 오키나와라는 같은 장소에 존재하면서도, 그곳은 오키나와가 아니다. 아이러니하다.


오키나와에서 벌어진 미군 성폭력 사건을 취재하게 된 잡지사 라이터 ‘키에’와, 사건의 진상을 함께 쫓으며 친해지게 되는 혼혈 오키나와인 ‘사쿠라’라는 두 여자가 등장한다. 미군 기지에 소속된 누군가의 소행으로 보이는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는데, 피의자의 수법은 이렇다. 늦은 밤 혼자 걷던 피해자를 뒤에서 목 졸라 기절시킨 후 어느 장소로 데려가, 눈가리개를 씌우고 자신의 욕망을 채운다. 그리곤 계속 눈을 가려둔 채 피해자를 임의의 장소에 풀어주고 달아나는데, 도주하기 전 눈을 뜨지 말고, 돌아보지도 말고, 100초를 카운트하도록 강요한다. 두려움 속에 피해자가 눈을 뜨고 나면 그녀를 둘러싼 것은 절망과 비참함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Screenshot 2025-09-15 at 4.20.59 PM.png 출처: https://viewnjoy.tistory.com/311



<펜스>는 성폭력 사건을 다루고는 있지만 지나치게 무겁고 암울한 내용의 분위기는 아니다. 특히 키에는 그녀 특유의 친화력과 뻔뻔함으로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호신술을 배워서 그런지 성격 역시 당당하고 대담하다. 자신의 두꺼운 낯짝을 활용해 숱한 사람들을 만나며, 일종의 탐문수사를 펼치는 그 과정이 때로는 유머러스한 일면도 있다.


그런데도 전체적인 터치가 절대 가볍지만은 않다. 우리가 잘 몰랐던 오키나와의 어둡기도 하고 슬픈 일면은 물론이고, 어찌 보면 일본 사회 전체에 대한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오키나와 내 미군의 부조리, 그들과 교섭할 의지는 없이 외면으로 일관하는 일본 정부의 무심함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담겨 있다. 동시에 여전히 낮은 여성 인권 및 성범죄 처벌 수위에 관한 사회 고발적인 메시지 역시 강하게 드러낸다.


또한 범인을 쫓는 추리와 서스펜스적 요소가 가미된 드라마이기도 하다. 한 에피소드당 50분, 총 5화로 구성된 이 드라마는 늘어지는 부분 없이, 긴박하게 범인을 쫓아가는 그 몰입감이 상당하다. 중반쯤에는 마치 뜬구름을 잡는 것만 같던 용의자의 폭을 크게 좁히게 되는 아주 중요한 복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덕분에 진짜 범인을 알게 되는 그 순간 아하, 하고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용의자는 바로 상시 주둔해 있는 사람이 아니라, 2, 3일 정도의 짧은 기간만 이 섬에 머무르는 사람이라는 것. 짧은 대사로 슬쩍 흘러갔지만, 복선을 깔아 두는 각본가의 솜씨가 아주 매끄럽고 탁월하다고 느꼈다.


주인공인 키에와 사쿠라 뿐만 아니라 함께 범인을 쫓는 조력자인 오키나와 경찰 ‘이사’를 보는 재미도 상당하다. 오키나와 토박이 출신의 그는 어렸을 때부터 미군 기지 근처에서 자라 영어와 미군의 존재에 익숙하다. 그에게 있어 펜스 너머는 현실적인 공권력의 한계를 부딪침에서 오는 무력감과 좌절감의 상징이다. 이사는 지금껏 오키나와 경찰들이 그러했듯 어느 정도는 타성에 젖어, 키에에 비하면 소극적인 태도로 수사에 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그 누구보다도 큰 용기와 정의감으로 사건을 종결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사실 이 경찰 역을 맡은 배우 ‘아오키 무네타카’를 보기 위해서 <펜스>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한 회차씩 아껴볼 심산이었지만, 드라마의 몰입감이 상당해서 약 다섯 시간을 모니터 앞을 떠나질 못하고 정주행을 완료했다. 잠시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다.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혹시 아직 이 드라마를 보지 못한 이들을 위해 잠시 공백을 두는 바이다.



Screenshot 2025-09-15 at 4.21.35 PM.png 출처: https://viewnjoy.tistory.com/311



<펜스>의 주인공은 오키나와의 여자들이다. <오키나와 신앙과 전통주거의 공간구성 조사 연구>에 따르면, 오키나와에는 ‘히누칸’이라 불리는 ‘불의 신-火の神(ヒヌカン)’이 있다. 이는 오키나와의 아마미 군도에서 믿어온 가신으로 집안을 재앙으로부터 막아내고 가족의 건강을 관장하는 수호신이다. 부엌 한쪽에 향로, 물, 소금, 꽃꽂이를 놓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고 드라마를 보는 내내 이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히누칸의 제의는 오로지 집안의 안주인이 치르며, 가족의 대소사를 보고한다고 한다. (백유정 외, 2020, p.6)


달리 생각해 본다면 히누칸은 단순한 신의 존재를 넘어서, 오키나와의 여자들의 또 다른 모습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전쟁에 징집된 남편과 아들을 잃고, 나중에는 섬에 주둔한 미군들에게도 각기 나름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아온 고단한 삶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마치 자신들의 염원을 투영한 그 신에게 빌며 버텨왔을지도 모른다.


오키나와 여자들은 참 강해. - <펜스(2023), 1화 중에서>


드라마의 한 구절이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강해질 수밖에 없게 만든 걸까. 나 역시 경상도라는 보수적인 곳에서 나고 자랐던 터라, 그 말이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의미를 잘 알 수 있었다. 그 말은 비단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 사람 자체가 강하다는, 단순한 칭찬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들은 살아가기 위해 강해질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Screenshot 2025-09-15 at 4.26.21 PM.png 출처: https://ko.photo-ac.com/photo/4084198


1. 키에,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


키에는 성인 남성들이 심심풀이로 즐겨 읽는, 다소 저속하기도 한 삼류 잡지의 기자이다. 그녀가 가진 상처는 바로, 어렸을 때 오키나와에서 어머니가 당했던 성폭력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키에의 어머니는 자신이 겪은 끔찍한 일을 그저 흐지부지 넘길 수밖에 없었고, 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동시에 증인인 키에를 차갑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바로 그 사건이 떠올랐을 테니까.


모녀는 이후 섬을 떠나 도쿄로 이주하지만, 평생 오키나와라는 말은 금기시되었다. 그녀는 그렇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게 된 어머니 슬하에, 자신 역시도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채 스물여덟 살이 되었다. 키에는 늘 도망치고 싶었던, 그리고 그래야만 했던 오키나와를 때로는 증오하고 그곳에 대해 일종의 복수를 하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이 사건을 해결하며 오랜 시간 동안 자신과 어머니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오키나와에 대한 상처를 치유하는 데 성공한다.


2. 사쿠라

사쿠라는 흑인 미군과 일본인의 혼혈이다. 혼혈임이 명백한 외모 덕에 다들 처음에는 영어로 말을 걸어오지만, 정작 그녀의 영어 실력은 키에보다도 서투르다. 그 어떤 일본인보다도, 그리고 오키나와인보다도 외모 면에서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사람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사쿠라만큼 오키나와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도 드물다.


외할머니 밑에서 자란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단순히 외모만을 보고 자신을 미군의 사상과 이념에 동조한다고 생각하는 편견 가득한 오키나와 주민들도, (마치 한국과도 비슷한) 인종적으로 보수적인 분위기를 가진 일본에서 흑인 혼혈로 사는 정체성의 고민마저도, 그 모든 것을 체념하고 떠안기를 택했다. 그저 착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다.


차별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면 그것이 더 실감 날 것만 같아, 현실을 훨씬 뼈저리게 자각해 버릴 것만 같아 속으로 삭이며 살아가는 그녀. 아름다운 곱슬머리를 매일 아침 억지로 헤어 스트레이트너로 펴야만 했던,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할 수 없었던 그녀는 그렇게 억누르고 감추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으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 마지막에는 전쟁 후 PTSD에 시달려 가족을 떠나야 했던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러 미국으로 향하게 되며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다.


3. 루나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이 아닐까. 루나는 아직 한참 어린 고등학생이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좋은 가정환경을 타고나지 못했다. 어렸을 때는 그녀의 친할아버지가 손을 대는 끔찍한 일을 겪었고 작중 가장 큰 비중으로 다루어지는 성폭력 사건의 숨겨진 피해자 역시도 그녀다. 루나는 으레 범죄 사건의 피해자들이 그러하듯이 폭력에 처하게 된 자신을 탓하며 PTSD에 시달린다. 다행히 심리 치료를 통해 조금씩 자신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4. 지유

결혼을 약속한 미군 남자 친구 알렉스를 둔 그녀는 만삭의 몸이다. 그러나 약혼자가 불법 대마 유통 사건에 연루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어 버린다. 그 바람에 약속했던 국제결혼 비자마저 취소되었고, 홀로 아이를 낳아 키우게 되는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여자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섬이라면 어떻게든 아이를 키워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비슷한 경험을 겪은 수많은 오키나와 여자의 사례들을 대변하는 캐릭터가 아닐까.


5. 사쿠라의 할머니, 그리고 오키나와 주민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도 다름 아닌 평범한 소시민들이다. 일제 치하 및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든 오키나와 주민들 역시 그 피해자였다. 일제는 오키나와를 강제 병합한 것으로도 모자라 전쟁을 위해 강제로 오키나와현민을 징집했다. 현민의 4분의 1이 죽었고, 오키나와 주민들이 정부에 항의했지만, 국가는 그들을 외면했다.


국가로부터 무시당한 그들의 수난은 그것만이 끝이 아니었다. 미군과의 불공평한 지위 협정 그리고 운용 체계는 바꿀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섭할 마음이 없는 정부의 무관심으로 인해 오키나와인들은 미군기지 반대파와 찬성파로 서서히 갈라졌다. 게다가 오키나와는 일본 정부, 그리고 섬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미군기지의 이중 착취로 인해 일본 내 최저 임금이 가장 낮고 빈곤율이 높다고 한다. 이곳의 불평등함은 다음과 같은 작중 대사를 인용함으로써 요약할 수 있다.


‘미군이 공무 중에 교통사고를 냈지? 그 피해자에게 사과하러 간 것도 방위국이야. 피해자가 오키나와 사람, 사과하는 것도 오키나와 사람, 반대파인 오키나와 사람에게 비난받는 것도 오키나와 사람.’ - <펜스(2023), 4화 중에서>


착잡한 마음에 ‘오키나와 미군기지’로 최신 뉴스를 검색해 보니 오키나와현 내에서 일어난 미군 관계자 관련 사건 중, 살인이나 강도, 성폭력 등 흉악범 검거는 1995년부터 2024년까지 123명에 달했다고 한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과 슬픔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마지막으로 극 중 이사 형사가 처절한 감정을 담아 했던 잊히지 않는 그 대사로 이 글을 마친다.


Sure, we can keep pretending those terrible crimes never happened, just as always.
(물론, 지금껏 늘 그랬듯이 그런 끔찍한 범죄들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외면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But those victims, every single one of them, they cannot.
(그러나 그 피해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I am not asking you guys to get off this island or anything.
(당신들에게 이 섬을 떠나라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All I want to do is to protect our people, just like how you protect your country.
(마치 당신이 자신의 조국을 지키는 것처럼,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은 그저 우리의 시민들을 지키고 싶은 것뿐입니다.) - <펜스(2023), 5화 중에서>




※ 참조 1: 백유정 외(2020), 오키나와 신앙과 전통주거의 공간구성 조사 연구, https://www.kieae.kr/xml/24541/2454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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