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에 담긴 분노의 메시지, 살인분석반 시리즈 3부작의 두 번째 장.
[수정의 고동 -살인분석반-(水晶の鼓動 -殺人分析班-), 채널 WOWOW에서 2016년 방영, 국내에서는 티빙 및 웨이브에서 시청 가능.]
<살인분석반> 시리즈 3부작의 두 번째 이야기, <수정의 고동>을 소개할까 한다. 이 두 번째 작품의 골자는 바로 주인공 키사라기의 트라우마 극복기이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지난 작품인 <돌의 고치>와 많은 내용이 연계되어 있다. 심지어는 지난 작품의 진범인 톨레미의 비중 역시 상당하다.
트라우마라는 이 성가신 녀석을 극복하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 않다. 아무렇지 않은 듯 잊고 있다가도, 어떤 무언가가 트리거가 되어 불쑥불쑥 자신을 압박하고 옥죄어 온다. 키사라기 역시 사건을 수사하는 와중에 종종 호흡 곤란을 겪는 등 지난 사건의 후유증에 시달린다. 본래 이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누군가와 소통하며 해묵은 감정을 푸는 것이지만, 그녀는 혼자 떠안고 삭이는데 익숙한 사람이다.
게다가 경찰의 윗선 중 한 사람은 작품 내 '경시청 여성 수사관 특별 양성 프로그램'에 뽑혀 수사 1과에서 활약하는 그녀를 이상하리만치 탐탁지 않게 여기기도 한다. 지난 사건의 트라우마와 동시에 수사 1과 내 유일한 여성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는 두 가지 압박이 동시에 그녀를 짓누른다. 그래서인지 키사라기는 <살인분석반> 3부작 중 어떤 작품에서보다 정신적으로 불안해하고 코너에 몰린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수정의 고동>은 지난 작품과 마찬가지로 여러 군데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가 있다.
1. 드라마의 몰입을 도와주는, 한층 더 매력적으로 돌아온 조연 캐릭터들
두 번째 작품이라 세계관이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형성되어서 그런지, 조연 캐릭터들의 소소한 설정들이 더욱 빛을 발한다. 컴퓨터를 잘 다루는 섬세한 사람이지만 막상 현장에서는 의외로 맥을 못 추는 캐릭터라던가, 듬직한 덩치를 자랑하고 의협심이 있으면서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캐릭터, 혹은 늘 차분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동료가 불합리한 대우를 받을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서서 변호해 주는 캐릭터라던가.
그리고 부하들의 마음을 다 들여다보는 듯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건이 있을 때마다 위가 아파서 약을 달고 사는 상사 캐릭터라던가. 이처럼 작중 키사라기가 속해 있는 수사 1과 11계의 사람들은 마치 내 주변의 어디에선가 본 듯 생동감 있는 묘사를 자랑한다.
물론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연인 '타카노 히데아키' 주임은 여전히 매력적인 인물이다. 냉정하고 무뚝뚝한 캐릭터의 외모와는 다르게 토마토 주스를 좋아한다는 귀여운 취향이 있다. 그는 첫 화에서 미행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키사라기에게 물이 든 컵을 엎지르는 연기를 시킨다. 그리고 서투른 발연기라고 일침을 놓는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 화에서 범인을 강압적으로 취조하면서 이성을 잃는 연기를 하는 그를 보고 나면 그럴 만도 했구나, 하며 일침의 이유를 납득하게 될 것이다.
2. 추리 이외에도 새로운 볼거리를 보여주려 애쓴 제작진
일반적인 추리 드라마와 다른 그림을 보여주려고 노력한 제작진의 의도가 보인다. 특히 그것은 마지막 화에서 다루어지는, 지하철 선로 내 대피 공간에서 폭탄을 발견하는 과정 및 해체하는 장면에서 여실히 느껴진다. 온도와 진동을 감지하기 때문에 더욱 섬세하게 다루어야만 하는 폭탄의 나사를 하나하나 풀어내며, 기판을 조심스럽게 뜯어내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색색의 케이블을 하나씩 끊어내는 장면 등. 그래서인지 드라마 전체에서 정통적인 추리의 요소는 훨씬 간단하게 묘사되지만, 덕분에 크게 아쉽지는 않다.
3. 톨레미과 키사라기의 관계
내가 그녀였다면, 톨레미를 구원할 수 있었을까? 지난 사건의 진범이었던 톨레미는 키사라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악연을 가졌다. 경찰이었던 자신의 아버지의 실책으로 발생한 피해자인 그. 평생 잊을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린 그녀의 아버지와 키사라기. 그러나 키사라기는 톨레미를 원망하지 않고 경찰의 한 사람으로서 그를 구원하려고 끝까지 노력한다. 그가 그녀를 거부하고 밀어내더라도 말이다.
그런 그녀의 노력이 통했던 것인지 둘은 톨레미의 사형 집행 전, 마지막이자 유일하게 인간적인 교류 비슷한 순간을 나눈다. 덕분에 그녀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의 안전을 구하기도 하고 말이다. 키사라기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돌아서는 톨레미의 표정에서는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그것은 슬픔인지, 외로움인지, 고독인지, 혹은 고마움인지.
<수정의 고동> 은 지난 작품 <돌의 고치> 보다 한 단계 더 충격적인 비주얼로 포문을 연다. 시체를 포함해 발견 현장의 모든 것들이 붉은 페인트로 뒤덮여 있는 흉악한 사건 현장이 시선을 끈다. 또한 사건 현장이 된 아파트의 문에는 예의 같은 색깔의 페인트로 커다랗게 'O'와 'X'라는 문자가 쓰여 있다. 경찰들은 이 범인을 그가 남긴 현장 성명에서 따온 'OX', 즉 '옥스'로 통칭하며 범인을 추리해 나간다.
살인 사건 자체도 끔찍하기 짝이 없는 와중에, 그에 이어서 각종 공공장소에서 의문의 폭탄 테러 사건이 연속적으로 발생한다. 엽기적인 연쇄살인을 자행하는 범인을 추적함과 동시에, 시민들을 노리는 폭탄 테러로부터 그들의 안전을 수호하려 동분서주하는 경찰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하는 스포일러 주의.
이 사건의 진범은 후지사키 테루아키, 인테리어 사무소를 경영하는 건축가이다. 그는 고등학생 때 건축 사무소를 하는 삼촌에게 거두어지며, 건축에 대해 배우며 자란다. 그러나 이 부부 내외는 소위 '인간쓰레기'로 묘사되는 질 나쁜 사람들이었다. 거액의 채무에 시달린 그들은 미리 들어둔 보험금을 타내기 위한 보험 사기의 목적으로, 건축 재능도 뛰어나고 선량한 사람이었던 후지사키를 건축 현장에서 고의로 추락시킨다.
그는 이러한 사건의 전말을 모른 채 살아가려 했으나, 건축사 사무소 직원의 폭로로 인해 모든 것을 알게 되고 좌절한다. 사고 이후 그의 인생은 처절하게 망가졌기 때문이다. 결국 분노와 복수심으로 점철된 그는 삼촌 부부를 살해하고, 그것으로는 모자랐는지 자신이 대리 설계했던 건물들을 모두 파괴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일혁협'이라 불리는 반정부 단체에 테러를 의뢰하게 되고, 그 단체는 대가로 그에게 살인청부를 지시한다.
그렇게 삶의 의지가 꺾여버린 재능 있는 건축가는 칼을 든 살인귀가 되어버린 것이다. 작중에서 그는 추락사고 후유증의 일환으로 극심한 두통에 시달린다. 그가 대리로 설계했던 건물들 및 장식물들에는 유리, 즉 수정이 전면으로 사용되어 마감되었다. 어쩌면 그가 밤새도록 시달린 두통의 이유는 이 유리들이, 수정들이 그의 마음속 분노와 공명하여 울어대는 고동 소리 때문임이 아니었을까.
따라서 이 작품은 살인범인 후지사키, 그리고 테러 단체인 일혁협이라는 별도의 두 개의 범죄 실행 주체를 다루고 있다. 즉, 일혁협의 배신자 처단을 의뢰받은 후지사키의 살인이 먼저 이루어지고, 이를 확인한 일혁협에서 후지사키의 의뢰인 건물 폭파 테러를 실행하는 것이다. 결이 다른 이 두 가지의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의문스럽기도 했고, 지나치게 많은 단서들에 헷갈리기도 했었는데 살인 사건과 폭파 사건이 일종의 교환 조건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굉장히 흥미진진한 이야기 전개라고 생각했다.
이번 시즌 <수정의 고동>은 스릴러에 집중하기 위해 추리적인 요소는 다소 간단하게 다루고 넘어갔다고 언급했지만, 그럼에도 섬세하게 짜인 복선들이 눈에 들어온다. 작품 내 사체 발견 현장에서의 모든 글자와 메모들은 붉은 페인트 아래 뒤덮여 가려진다. 범인이 무언가 중요한 정보를 은폐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하고 경찰은 상세히 조사하지만 그 내용들은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는, 말 그대로 중구난방이었다.
1화에서 탐문 수사를 위해 도서관에 들른 키사라기와 타카노는 한 남자와 아주 짧은 순간 눈이 마주친다. 이 남자는 4화에서 진범인 '옥스'에 관한 아주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목격자로서 재등장한다. 바로 옥스가 점자 코너에서 책을 골랐다는 것. 이것은 옥스가 눈이 불편하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며, 비로소 타카노는 지금까지 경찰을 산만하게 했던 수많은 실마리들이 하나로 연결되는 것을 깨닫는다.
첫인상부터 기묘한 위화감을 주는, 인테리어 사무소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심플한 후지사키의 사무실. 으레 책들로 가득 찬 커다란 책장 하나쯤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보이지 않는 서적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용도가 불분명한 스캐너. 그 모든 것은 범인인 옥스가 난독증을 가진 후지사키라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살인 청부 당시 조직에 관련된 정보를 인멸하도록 의뢰받았음에도, 난독증으로 문자를 인식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글자가 쓰여 있는 모든 것을 붉은 페인트로 뒤덮어버린 것이다. 엽기 살인으로 위장하려는 측면은 덤으로 말이다. 이 추리 시퀀스는 시청자로 하여금, 두 가지 다른 범죄 주체로 인해 뒤죽박죽 섞여버린 사건의 퍼즐을 마침내 올바르게 짜 맞추는 듯한 쾌감을 선사한다.
<수정의 고동>을 통해 키사라기는 마침내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되며, 병아리 수사관의 티를 벗어내고 11계의 중요한 일원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윽고 어엿한 한 사람의 지휘관으로 성장하는 그녀의 모습은 <살인분석반>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나비의 역학>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댓글과 좋아요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