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필사하며.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2009년 초판 발행)
지난 포스팅에 이어지는 글이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으며 기억에 남는 문장들을 필사하는 것으로 이 책을 마무리해 본다. 단순히 달리기에 관한 내용만 다루는 책은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자신의 인생의 궤적, 그리고 소설가로서의 직업관 역시 담담하게 풀어낸다.
14. 그리고 무척 평범한 견해이긴 하지만, 흔히 말하듯,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는 열심히 하는 만큼의(어떤 경우에는 지나치리만큼의) 가치가 있다.
15. 육체가 시들면 (우선 아마도) 정신도 갈 곳을 잃고 만다. 그와 같은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지점을― 결국 내 활력이 독소에 패배해서 뒤처지고 마는 지점을― 조금이라도 뒤로 미룰 수 있기를 바란다.
16. 끝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우선 한 단락을 짓는다는 것뿐으로, 실제로는 대단한 의미가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끝이 있기에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17.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문장을 지어 나가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쓴다고 하는 작업을 통해서 사고를 형성해 간다. 다시 고쳐 씀으로써 사색을 깊게 해 나간다.
18. 그러나 아무리 문장을 늘어놓아도 결론이 나오지 않고, 아무리 고쳐 써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경우도 물론 있다. 가령 지금이 그렇다. 그럴 때에는 그저 가설을 몇 가지 제시할 수밖에 없다. 혹은 의문 그 자체를 차례차례 부연해갈 수밖에 없다. 혹은 그 의문이 지닌 구조를 뭔가 다른 것과 구조적으로 맞대어 비교하든지.
19. 태도를 언제까지나 정하지 못한 사람처럼 비는 구질구질 계속 내리고, 마지막에는 마침내 작심한 듯 호우가 되었다.
20. 인생에 있어서 문제의 태반이 그렇듯 이 통증은 아무런 징조도 없이 돌연히 찾아왔다.
21. 그러나 우리의 의식이 미로인 것처럼 우리의 몸 역시 또 하나의 미로인 것이다. 도처에 어둠이 있고, 도처에 사각이 있다. 도처에 무언의 암시가 있고, 도처에 이중성이 기다리고 있다.
22. 물론 조크다. 죽는 날까지 열여덟 살로 있으려면 열여덟 살에 죽지 않으면 안 된다.
23. 무슨 일의 기본을 착실하게 몸에 익히려면 많은 경우 육체적인 아픔이 필요한 것이다.
24. 우울한 구름 조각이 위장 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처럼,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25.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내가 좋아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좋아서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26.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주워 담을 것은 주워 담고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결점이나 결함은 일일이 세자면 끝이 없다. 그래도 좋은 점도 조금은 있게 마련이고, 가진 것만으로 어떻게 참고 갈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27. 물론 시간은 걸린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시간을 들이는 것이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 된다.
28. 가령 몇 살이 되어도 살아있는 한, 나라고 하는 인간에 대해서 새로운 발견은 있는 것이다.
29.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고통을 통과해 가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에서 자신이 살고 있다는 확실한 실감을, 적어도 그 한쪽 끝을, 우리는 그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30. 효능이 있든 없든, 멋이 있든 없든,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눈에는 보이지 않는(그러나 마음으로는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때때로 효율이 나쁜 행위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31.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32. 그리고 시간과 세월을 들여, 그와 같은 레이스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서 최종적으로 자신 나름으로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대중 매체에 자신을 많이 노출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겐 이 책이 더욱 반갑게 느껴질 것이다. 나 역시 아주 즐겁게 읽었다. 읽다 보면 저절로 책을 덮고 밖으로 나가 달리고 싶게 만든다.
달리기를 하며 숨이 찰 때마다, 이 짓을 왜 하는 걸까,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을 머릿속으로 되뇌곤 한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