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무지개산’ 꼭대기에서 끈기를 말하다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 건 남편 때문이었다. 두 달 전부터 부부 상담을 받고 있다. 3년 차 신혼부부 사이에 놓인 ‘성격 차이’라는 이름의 강은 예상보다 깊고 넓었다. 갈수록 다툼의 수준과 횟수는 점입가경으로 치달았고 마침내 우리는 집 근처 부부 상담센터 문까지 가게 됐다. 자신의 성격과 기질을 파악하는 일명 ‘TCI’ 검사를 받게 된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관계를 개선하려면 우선 각자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심리 상담 선생님은 우리에게 하나씩 검사지를 나눠줬다.
몇 주 뒤 검사 결과가 나왔다. 자극 추구, 위험 회피, 자율성, 연대감 등 여러 항목에 백분위 점수가 매겨져 있다. 동공이 커진 곳은 ‘인내력’ 항목이다. 100점 만점에 30점대. (아마도 내 뇌는 크나큰 충격을 받아 정확한 점수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다.) 학창 시절에는 물론 재수, 삼수까지 준비하면서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점수가 내 결과지에 적혀 있다.
인내력, 좀 더 친근한 말로 끈기를 기를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 뒤따른다. 의자에 앉아서 하는 ‘엉덩이 씨름’을 누구보다 잘해 전교 1등도 해본 내가 끈기가 부족하다니. 취업 준비생 때만 해도 이랬을 리 없다. 그렇다면 직업인이자 직장인으로 살아낸 지난 7년, 내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만감이 교차하며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 불과 열흘 전의 내가 떠오른다.
나는 안데스산맥 앞에 서 있다. 여행사 차를 타고 창밖으로 낭떠러지가 보이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왔다. 이미 해발 3천 미터가 넘었다. 산소가 부족해 두통을 비롯한 고산병 증세가 나타나는 고산 지대다. 여기서 2천 미터 더 높은 곳으로 올라야 한다. 땅속 광물이 띤 고유한 색깔들로 ‘무지개산’이라고 불리는 페루의 ‘비니쿤카’를 오늘 등정할 것이다.
비니쿤카에 오기 전 고산 지역인 ‘쿠스코’에서 적응기를 가졌지만, 한국에서도 등산은 숨이 차오르는 행위이기에 특별히 휴대용 산소통도 챙겼다. 자력으로 비니쿤카 정상에 오르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고 알고 있다. 꿈에 그리던 이곳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벅차오른다. 함께 온 남편에게 ‘정상 안 가도 된다, 힘들면 잠시 멈춰도 되고 천천히 가도 상관없다’고 했다. 가이드가 허용한 시간 안에서, 남들 신경 쓰지 말고 우리의 속도를 지키기로 약속한다. 다만 가능하다면 한계점까지는 포기하지 않기로 한다.
원주민들은 말을 끌고 와 산 초입부터 우리를 유혹한다. 약 3만 원(페루 돈으로 70 솔)만 주면 말에 태워 정상 즈음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것. 실제로 평탄 그 자체인 등산로를 몇 걸음이나 걸었다고 벌써 숨쉬기가 어렵다. 1년 가까이 요가 수련으로 배운 호흡법으로 페이스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체력이 좋은 다른 여행객들은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애초에 말에 오른 여행객들도 유유히 우리 옆을 지나친다. 아랑곳하지 않고 뚜벅뚜벅 걷는다. 화장실과 매점이 나타나며 첫 번째 지점을 통과한다. 무사히 견뎌냈음을 자각한다.
선두 주자와 후발 주자 모두를 살피는 가이드에게 우리는 ‘이쯤에서 포기했으면 좋겠는데 절대 포기하지 않는 꼴등’들이다. 한국에서 왔다는 젊은 부부가 과연 정해진 시간 안에 정상을 찍고 내려올 수 있을지 그는 의심한다. 계속해서 우리 곁을 맴도는 원주민들의 말을 가리킨다.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편하게 말을 타라고 권유한다. 거리가 짧아진 만큼 가격도 저렴해졌다면서. 잠든 스마트폰을 깨워 시간을 확인한다. 아직 여유가 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조금 더 가보겠다고 한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가이드가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져 간다.
“옆에 봐봐!” 남편 목소리에 그제야 주변을 돌아본다. 어느새 무지개 빛깔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남편과 나는 신나서 사진을 찍는다. 여기까지 온 서로를 ‘찰칵’ 소리로 격려한다. 저 멀리 정상이 보인다. 이 언덕만 건너면 금방 도착할 것 같은데 땅에서 발바닥이 떨어지지 않는다. 두 걸음 걷고는 얼굴이 누렇게 떠버린다. 깜짝 놀란 남편이 서둘러 산소통을 내 코와 입에 갖다 댄다. ‘급속 산소 보충’으로 내 얼굴이 하얘짐과 동시에 만만치 않게 노래진 남편 낯빛이 보인다. 번갈아 가며 산소를 급하게 빨아들이다 결심한다. ‘이제 말을 타자. 여기까지 충분히 잘했어.’
앞서가던 가이드를 급하게 부른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끄는 원주민을 섭외한다. 고도가 5천 미터 가까이 되는 이곳은 말조차 걷기 힘든 곳이다. 말도 정상에는 가지 못한다. 결국 정상은 사람의 발로 밟아야 한다. 말을 타고 갈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10분. 3만 원에 달했던 가격은 8천 원까지 떨어졌다. 코앞에 놓인 성공을 향해 우리는 말에 오른다. 말 위에서조차 쉽지 않은 10분이 지나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You can do it!” “Cheer up!” 끝끝내 정상으로 가는 계단에 오르자, 맞은편에서 내려오는 전 세계 동지들의 응원이 쏟아진다. 계단 하나하나가 헬스장의 ‘천국의 계단’ 하는 것보다 배로 힘이 든다. 숨이 꼴깍꼴깍 넘어갈 것 같으면 멈춰 서서 심호흡을 한다. 남은 계단은 5개. 손끝 발끝에 남은 힘을 쥐어짜서 계단 하나를 겨우 오른다. 노랗게 노랗게 물들어버린 얼굴로 눈을 뜬 순간. 뿌연 안개 사이로 빨간색과 파란색과 하얀색이 뒤섞인 돌산이 눈 안에 들어온다. 아, 여기는 정상이다.
그리고 현재 이곳은 해발 고도가 ‘0’인 한국이다. 비니쿤카의 시간은 추억이 됐고 나는 남편과 부부 상담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가고 있다. 차 조수석에 앉아 끈기를 몸으로 배웠던 그날을 기억한다. “얼굴이 노래질 만큼 숨도 못 쉴 곳에서 끝내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던, 타인을 보되 크게 경쟁하지 않고 내 속도로 걸어갔던 나는, 우리는 진짜 멋졌다. 무지개산의 자태는 그런 우리에게 주어진 깜짝 선물이었다.” 일기장에 적어둔 문장들을 마음속 깊이 새긴다.
비니쿤카에 가기 전 치른 성격 검사 결과에 연연하지 않기로 한다. 비니쿤카 덕분에 적어도 인내력 점수가 30점대에서 50점대 정도로는 오르지 않았을까, 긍정적으로 상상해 본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또 어떤가. 끈기 ‘만렙’이었던 터라 끈기를 어렸을 때부터 다 끌어다 썼으니 잠깐 ‘쪼렙’이 될 만도 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30점대 인내력으로 비니쿤카 정상에 오른 스스로가 대견하다 못해 경이로울 지경이다. 이쯤 되면 ‘인내력 30점대 맞아?’라는 합리적 의심에 다다르게 된다. 이 합리적 의심을 운전석에 앉은 남편과 공유한다. 피식 웃는 옆모습이 보인다. 형형색색으로 가득했던 그곳에서 본 얼굴이다.
끈기를 주제로 써 본 여행기랄까, 아무튼 에세이입니다.
일요일 발행을 위해 두어 시간부터 급하게 써 내려간 따끈따끈한 제 글입니다. 퇴고도 제대로 못해 부족한 글이긴 해도, 저와 독자님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내일 출근이 몇 시간 안 남았네요 허허) 발행 시간은 독자님들 출근하시는 내일 아침으로 예약 걸어두고 저도 이제 자러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비니쿤카 동지인 남편이 계속 기다리고 있네요.
제 글과 함께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이번 주도 우리 모두 힘내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