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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Dec 12. 2018

사색18. 결과

3월 10일(월)

세탁기가 빨래 끝났다고 울어댄다. 뒤엉킨 빨래를 풀어보려 흔들어보지만 서로 꼭 손잡은 듯 떨어지지 않는다. 한 시간 넘게 깊은 물에 잠겨 이리저리 휘돌려지다가 마지막 탈수 7분을 견딘 엉킴이다. 혼자서는 세탁통의 강력한 회전을 못 견디니 서로 손 잡고, 물에 잠겨 죽어버린 시체들 같다. 그 견딤의 결정을 함부로 하지 못하고 겸손하게 하나씩 풀어낸다. 볕 좋은 곳에 건조대를 두고 자연 건조염을 한다. 가장 먼저 수건, 그다음 겉옷, 속옷, 양말, 손수건 순이다. 건조대 하나로는 일주일치의 빨래를 널기 부족하다. 빨래 널 때마다 건조대 하나 더 사야지 다짐을 하고, 일주일을 보내고, 또 사야겠다는 다짐을 반복한다. 먼 미래도 아니고 일주일마다 다짐을 몇 년 동안 하고 있다.           


양말까지 염을 마치려는 데, 갑자기 뭔가 알 수 없는 뜨거움이 뱃속에서 치밀어 입 밖으로 나온다. 씨팍, 못 참겠다. 면접 본 곳에 전화해서 결과가 어떻게 됐나, 왜 아직까지 아무런 연락이 안 오는 거냐고 묻는다. 퉁명스럽게 넘어오는 소리는 이미 다른 사람을 채용했다고. 힘이 빠진다. 서류도 아니고 경력직 면접을 봤는데 결과가 났으면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따지려다가 전화를 끊는다. 따져본들 고쳐지랴, 고쳐진들 떨어진 건데.  

         

저녁에는 예전에 등록한 글쓰기 교실에 간다. 사회부 기자 한분이 매주 월요일 광화문 앞 조선일보사에서 ‘신문기사’ 장르의 글쓰기 노하우를 알려주는 강좌이다. 대학 때부터 재밌게 신문을 읽다가 기사는 어떻게 쓸까 생산자 입장이 궁금해 정초에 강좌를 신청했다. 즐겁게 수강하다가 실직하고 난 뒤 광화문까지 갈 힘이 없어 강의를 두 번 빼먹었다. 면접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이 기분으로 수업에 집중할 수 있을까. 막상 한 걸음 떼니 두 걸음, 세 걸음 잇게 되고, 그렇게 광화문 조선일보사까지 간다. 강의실에 앉아 있을 땐 정신없다가 수업을 시작하니 집중이 되더라. 오늘이 마지막 강의라 논설위원 한분이 특강을 한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이라 머리에는 뿔이 달렸고, 엉덩이에는 삼지창 모양으로 갈라진 꼬리가 있을 줄 알았는데, 고등학교 3학년 주임 선생 같이 괴팍한 분이다. 그리고 정말 고등학교 선생이 전직이었단다. 문장과 문장의 관계, 글의 도입 문장, 서사를 하다가 ‘그래서’, ‘그런데’ 같은 접속어로 상관관계를 만들지 마세욧! 하며 글을 써야 하는 자세를 열정적으로 역설한다. 저 정도 미쳐야 조선일보 논설위원 하겠다. 역설하는 글쓰기 방법을 들어보면 일리가 있긴 한데, 왜 그렇게만 써야 하는지, 자신의 주장만 강요하고 근거를 전혀 설명하지 않아 수긍은 가지만 공감하기는 어렵다. 마치 근거를 대지 않고 주장만 하는 게 어떤 카리스마를 보이는 것이라고 본인은 생각하나 보다. 여하튼 보수적인 신문사로 알려진 조선일보에서 이런 글쓰기 수업을 들으니 기자의 글쓰기 전문성과 언론사주의 지침은 어떤 관계가 있을지 궁금해진다. 언론사 역시 회사 운영하는 차원에서 투자자, 광고주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승진 또는 소득을 고려하는 직장인 입장의 기자는 적절히 알아서 기사를 쓸 수밖에 없지 않나. 보수적인 언론사에서 진보적인 인사를 보도국 사장으로 영입해 기조를 변화시키는 건 변화한 언론 수요에 반응하는 수익성을 최고로 고려한 차원 아닐까. 마지막 수업이라 수강생이 교실에 둘러앉아 맥주 한 캔 씩 마시며 강좌를 마친다. 이제사 둘러보니 기사 글쓰기 수업이라 방송 기자나 아나운서를 지원하려는 대학생들도 있다. ‘그래서’ 예쁜 여학생들이 많더라. ‘그래서’ 실직했다고 기운 빠져 빼먹은 강의가 아깝다.           


광화문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 가스펠 가수 어빈 슬레이터 Alvin Slaughter의 노래를 듣는다. 가사 중 “when he steps in”이라는 가사가 있다. 어떤 결정의 순간, 그때 하나님이 개입한다고(한 걸음 들어온다). 만약 면접 결과를 알기 전에 이 노래를 들었다면, 하나님 제 인생에 지금 개입해주십시오, 이번 채용, 제 취업에 개입하십시오 하고 기도했을 텐데, 이미 떨어졌다는 결과를 알고 나니 ‘when he steps in'이라는 가사에 둔감해진다. 아니, 화가 난다. 왜 개입하지 않냐고, 개입해서 채용시키지 않고, 떨어지게 놔두는 거냐고. 어차피 안 될 건데 왜 면접을 봐가지고, 면접을 안 봤다면 지금 낙담할 일도 없을 것 아닌가. 괜히 바람만 가득 찼다가 빠진 풍선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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