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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Dec 12. 2018

사색19. 채식과 매혈

 3월 11일(화)

‘교회 동생’ 정지인과 점심을 같이 먹는다. ‘교회 ○○’은 어떤 관계를 말하는 걸까. 1990년대 한국 기독교에서 대학생 교인이 증가하면서 나타난 교회 ○○관계. 구성이 남자, 여자 라면 연인이 될 가능성이 있으면서, 동시에 연애와 전혀 상관없기도 하다. 그렇게 ‘교회’로 수식되는 동생, 누나, 오빠가 흔하지만 정확히 어떤 관계를 말하는지는 모호하다. 애매모호한 관계를 퉁치는 비겁한 표현인지 아니면 정말 아무 관계가 아닌 발전 가능성도 없는 냉정한 정의인지. 


지인과 나는 그런 ‘교회 동생’, ‘교회 오빠’라는 모호한 정의에 넣어버리기보다 어려울 때 격려해주는 좋은 사람이라는 뚜렷한 의미를 가진 교회 동생이다. 대학원 졸업하고 취직을 준비하며 스트레스받고 있을 때 지인이가 63 빌딩 수족관, 아이맥스 표를 구해 교회 친구들과 같이 간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안 간다 하니 오빠 방에만 있지 말고 같이 가지고 졸라 결국 함께 나섰다. 막상 가보니 아이맥스에서 그랜드캐년을 3D로 상영하고 있었는데, 3D 체험이 너무 실감 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 사실 오빠는 취직도 안 되고 해서 63 빌딩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려 했다고, 근데 오늘 생각보다 재밌어서 그러지 못했다 덕분이 다며 고맙다 하니, 수학을 전공하는 지인이는 63층에서 뛰어내렸으면 대략 7초면 땅에 떨어진다고 친절하게 계산해줬다. 그렇게 7초를 계산해주는 친절한 우리 사이를 마냥 교회 오빠, 동생으로 부르긴 싫다.           


정지인이 선택한 점심 식당은 채식 뷔페로 채소 식단으로 구성한 메뉴만 있는 곳이다. 나라면 절대 선택할 리 없는 장르다. 채식이든, 육식이든 그때도 지금도 날 위로하려는 지인의 마음이 감사할 따름이다. 채소라서 다른 식당보다 상당히 가격이 비싸다. 식당 사이즈가 작아 긴 줄에서 테이블을 기다린다. 더 비싼 돈 내면서 더 오래 기다린다. 오래 기다려 겨우 앉아서 식사하다가 긴 줄에 서 있는 사람을 보면 빨리 먹고 자리를 비워줘야 할 것 같다. 채식은 일반적으로 마냥 밥 먹는 선택보다 훨씬 더 고려한 선택이다. 그런 비용을 치르고 식당에 왔는데 좁아터져 불편하다면, 만약 식당주가 좁은 세팅으로 손님들이 얼른얼른 일어나게 만들어 회전율을 높이려는 전략이라면, 장기적으로는 수익이 날지, 유지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식당에서 무얼 먹을지 정할 때 보통 음식 메뉴가 눈에 들어오는데, 실직 중에는 음식보다 가격이 훨씬 커다랗게 보인다. 소득이 사람의 행태에 주는 영향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돈 벌 땐 가격이란 신호에 얼마나 둔감했나. 무소득이라는 제약은 점심값 단위의 지출에도 감각을 기울여 반응하게 한다. 당장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궁상떠는 건 아닌지.                


식사 중에 ‘점심 잘 챙겨 먹고 있니’라고 어머니 문자가 온다. 회사 식당에서 식사하는 척 거짓말로 답장한다. 실직했다는 말을 하긴 해야 할 텐데 아직 그 말을 꺼내기 어렵다. 실직은 가구의 일이다. 근로자 1명을 짜르는 건 가족의 주요 소득원을 사라지게 만드는, 가족 단위의 문제이다. 하지만 실직 당사자는 혼자서만 무거운 짐을 지려한다. 혼자만의 책임이 가끔 가족의 책임으로까지 과대 확장해서 ‘아버지 실직에 따른 일가족 자살 사건’ 같은 일이 생긴다. 소득이 없는 아버지는(근로자보다는 사업자에 해당하는 일이지만) 아내, 자식의 앞날도 이젠 없다고 스스로 판단해서 ‘나만 죽을게’에서 ‘우리 모두 죽자’고 연대한다. IMF 때 아침에 눈뜰 때마다 휘청휘청 쓰러지는 회사만큼 뭉텅뭉텅 죽어나가는 일가족이 얼마나 많았나. 그렇게 실직은 개인에서 가족으로 무섭게 확대한다.           


식사를 마치고 충동적으로 헌혈을 한다. 요즘 헌혈하면 영화표를 준다고 해서, 실직자니 피라도 팔아서 영화를 봐야겠다는 농담에 지인이도  오빠, 나도 학생인데 무슨 돈이 있냐며 둘이서 덜컥 매혈을 해서 영화 티켓을 산다. 헌혈하면 간 기능 검사도 해주고 또 다른 이득이 있다고 하지만, 내 피 값은 얼마나 할까, 영화표도 주고 간 기능 검사도 해주고, 오렌지에, 빵에. 옛날에 피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분들은 요즘은 뭘로 연명하실까. 배부른 시대는 피 장사가 잘 되지 않나. 일반 전혈이 아닌 성분헌혈은 40분이 걸리고, 보상도 두 배라고 한다. 요즘 시간 많은데 다음에는 성분헌혈이나 해볼까.           


같이 짤린 해직 동료 선준욱 과장에게 전화가 온다. 어떻게 지내나, 마지막 달 월급 정산은 어떻게 됐나, 계약을 어떻게 종료하기로 했더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결론은 사장 시팍새끼 하며 통화를 마친다. 해고 당시 선 과장은 허허허 잘됐다 이제 좀 쉬면서 놀자 하더니 이제사 분노 단계에 들어선 것 같다. 나도 화가 나지만, 선 과장은 진짜 열불 터질 듯, 회사 창립 때부터 고생은 고생대로 해놓고 이렇게 엿 먹다니. 채식으로 다스린 속이 뒤집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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