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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Dec 12. 2018

사색20. 기네스 그리고 달라스바이어스클럽

3월 12일(수)

여전히 오후 1시에 일어난다. 침대에서 나와 보니 오후 2시다. 귀한 오전을 침대에서 다 날린다. 그동안 이렇게 보낸 오전이 아깝다. 침대에서 날려버린 오전만 모아 ‘시간의 방’을 만들어 체력을 단련했다면 초사이어인 두 번은 됐을 게다. 눈 뜰 때마다 시계를 보고, 또 늦잠 잤네 후회하고, 밤에 잠들 때 내일은 꼭 오전에 일어나 뭘 하긴 해야지 다짐하지만, 늦잠과 다짐의 승부는 언제나 결정 나있다. 늦잠, 실직이라는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라 하지만, 그런 변명은 오히려 더 초라해진다.  


이력서, 지원서를 쓴 걸 읽어보면, 참 잘 쓴 것 같다. 내가 나를 감탄한다. 33년 인생 결정체가 종이 네 장으로 응축됐다. 내가 감탄할 게 아니라 채용 담당자가 이걸 어떻게 보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여러 곳의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서를 넣으면서 내가 이런 직종, 직무를 정말 원하기는 하는 건지, 갑자기 실직했으니 아무 곳이라도 당장 들어가자고 막 넣는 건지. 내가 심지어 여기에서 이런 일할 수 있나, 이런 델 가야 하나, 평소 생각도 못 해보던 곳에 지원을 하고서 고민을 시작한다. 특히, 이전 직장이 해고가 쉬운 형태라 지금 이 처지가 된 거라면 고용이 보장된 곳이라면 청소, 빨래, 뭐든 하겠다는 마음이다. 그런데 과연 청소, 빨래 일을 내가 견딜 수 있을까.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만큼 견딜 체력이 있나. 이런 고민 자체가 아직 배부른 소린가. 어떤 채용 공지는 구비 서류에 요구사항이 너무 많아 서류 접수하는 데만 반나절이 걸린다. 결국 귀한 하루를 절반은 잠으로, 남은 절반은 이력서 지원서를 쓰면서 보낸다.      


오는 2월에 군대 가는 이철환이 만나잔다. 집 앞 호프에서 맥주를 마신다. 대학을 졸업하고서야 군대를 간다니 위로하는 의미로 비싼 기네스 맥주를 시킨다. 피를 팔아 영화 본다고 궁상떨다가 술 마실 땐 덜컥 덜컥 주문한다. 소비는 이성적이지 않다. 


투명한 유리잔에 기네스 맥주를 따르면 검은 거품이 맥주잔의 최상단까지 올라갔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게, 블랙홀이 빛과 공간까지 빨아들여 뒤틀리는 시공간을 보는 듯하다. 두 세잔을 비웠나, 영화 보자 해서 극장으로 간다. 마침 좋아하는 배우 메튜 메카니헤Matthew McConaughey의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 상영 중이다. 에이즈 환자의 절박한 상황, 제약회사의 볼모로 잡힌 의사가 효과 있는 타회사의 약을 처방해주지 않자 국경을 넘어 멕시코로 가서 직접 약을 구해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주인공의 절박한 마음이 실직 상태의 내 감정과 동화돼 버려 상영 시간 내내 마음이 무겁다. 또, 평일 저녁에 내일 아침 출근을 걱정하지 않고 극장에 와있다는 게 익숙하지 않은 시공간이라 가벼운 공황장애에 빠진 느낌이다. 내가 여기서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좀처럼 집중할 수 없고, 즐겁지 않다. 영화 자체도 그리 즐겁지 않다. 영화에는 소수자(동성애), 병자의 입장을 이해하려면 같은 처지가 돼봐야 배척에서 배려와 이해라는 자세를 가져 화해가 이뤄진다는 메시지를 준다. 더 정확하게는 동성애를 이해할 수 있다기보다 같은 소수자의 입장이 되면 기존의 입장에서 달라진다는, 각 소수의 옳고 그름에 대한 바른 판단을 묵인하게 하는 지점도 있다.      

      

“그래도 난 형을 존경해요”

심야에 마친 영화,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에서 철환이가 조용히 내뱉는다. 이제껏 살면서 존경한다는 말을 처음 듣는데 마음은 울적하다. 그렇게 실직은 충격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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