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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Dec 16. 2018

사색23. 신앙인과 주식

3월 15일(토)

어젯밤에 새벽 3시 넘어 잠들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아보는데, 내 앞날이, 당장 코앞 내일부터 막연하다는 생각에 도통 잠이 오지 않더라. 오후 2시를 지나 침대에서 나온다. 오전을 날렸다는 후회를 매일 같이 반복한다. 폐인 같다. 그렇다고 자기 비하로 남은 하루를 도배하진 말자. 반나절 남은 하루든, 온전한 하루든 어떻게 보내기 나름이다.     


구약 성경을 펼친다. 창세기를 읽는다. 태국 파타야의 밤거리 같은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하나님이 멸망시킨다. 분노한 신의 심판으로 도시가 멸망하는 긴박한 순간에도 롯은 고향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야 할지 주저(hesitate)한다. 롯을 보면서 지금 가지고 있는 주식을 처분할지 말지 주저하는 나를 대입해본다. 주식을 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일용할 양식, 나 스스로 한번 벌어보자는 것이다. 신앙인은 소득(익숙한 표현으로 물질)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다며 고백하면서 주식 투자를 한다는 건 내가 직접 소득을 창출할 수 있다는 행위이다. 신으로부터의 일용할 양식으로 하루를 사는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지만 요즘 만연한 재테크 풍조의 기저에는 앞으로 몇 년의 양식을 미리 축적해보자는 것이다. 재테크를 하지 않으면 남들보다 뒤떨어지는 것, 미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 같다. 수많은 은행, 투자회사 광고는 저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불안감을 주고 있다. 돈에 대한 고민이 소득을 창출할 수 있는, 일용할 양식을 주는 신에 대한 신앙을 방해하고 있지 않나. 방해하지 않는 수준이면 투자해도 괜찮겠지만, 과연 투자해놓고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나? 100만 원 정도 주식을 가지고 있어도 하루에도 몇 번씩 휴대폰으로 시세를 확인하는데, 또 스마트폰 덕분에 주식 시장 접근성이 얼마나 쉬워졌나. 신앙생활에 방해받지 않는 수준이라면 괜찮다면 나는 지금 어느 수준인가. 지금 당장 주식을 처분해야 할, 소돔과 고모라 같이 심판으로 멸망하는 긴박한 순간인가. 긴박한 순간에 나도 롯처럼 주저하는 건 아닌가. 지금 팔면 손해라 더욱 주저할 수밖에 없지 않나. 이걸 지금 처분해야 하나? 신앙인이 신과 관계를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더 두려워해야 하나?      


평소 지인에게 주식투자를 권해왔다. 물리학과 친구들에게 그래프 기울기 볼 줄 아니 주식 차트 보면서 거래 좀 해라고, 실력이 아깝지 않냐고, 요즘 일반 은행 저축 이율 보면 저축할 맛도 나지 않는데. 또, 남들 다 주식하고 있다면 마냥 저축하는 사람의 상대적 박탈감, 불안감은 더 크다. 그러니 주식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데 지금 내 주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처분하기보다는 스마트폰의 앱, 노트북의 주식 프로그램을 삭제한다. 접근성을 낮춰 본다. 이걸로 충분할까. 아직 손해를 보면서까지 주식을 처분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렇게 까지 결단할 만큼 신앙적인 사람은 아니다. 괜히 지금 실직했다고 주식 다 팔고 신앙생활에 집중하면 다시 취직될까 봐 그러는 마음도 있는데, 분명하게 지금은 팔지 않고 싶다. 곧, 오를 것 같다. 더 분명한 것은 내가 부른 호가에 계약이 체결되는 그 몰입을 신이 좋아할 리는 있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자기 말고 딴생각을 하는 신자에게는 적절한? 고난을 줘서 자기와의 관계를 회복하려 한다는 건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내가 주식했다고 실직 상황을 주셨나? 꼭 그렇게 생각하기는 싫지만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지금 ‘주식’ 말고도 하나님과 관계를 방해하는 다른 것들이 있나? 실직 기간에 신앙인으로 철저히 점검하는 시간이 돼야 할 것이다. 시간이 많아서 그런지 생각과 행동에 신앙이 투영되기 시작한다. 실직은 그동안 의미 없이 지나쳤던 수많은 일상에 의미를 가지게 한다. 특히 신앙적으로 인과를 찾게 한다. 내가 그리 신앙적인 사람도 아니었는데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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