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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Dec 16. 2018

사색24. 신앙과 직업

 3월 16일(일)

모닝콜, 

어머니와 안부를 나누다, 지금 실직했고 사실 2주 정도 지났다고 말한다. 수화기 너머 어머니 목소리가 덤덤하다.        


“니가 제일 고생이지, 고마 짐 싸서 그냥 내려오너라”

위로의 말을 농담, 진담 섞어하신다. 어려운 일이라 미뤄두다 덜컥 털어놓으니 마음 편하다. 이 상황을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말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진 모르겠다. 어머니께서 속상한 소리 하지 않으시고, 공감해줘서 감사하다. 어려운 일을 간단하게 처리했다. 다행스럽다.        


2년 전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마침 대학원을 마치고 취업을 잠시 미루고, 고향 부산으로 내려가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 아버지의 병환, 장례라는 어려운 일을 어머니와 함께 겪으며, 우리 두 사람이 호흡이 잘 맞는다고 느꼈다. 모자 관계가 위기를 함께 해쳐온 전우 같이 성숙해졌다. 내달 첫째 주 주말이 아버지 기일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직 힘들 텐데, 이 기간을 견디는 것도 큰일인데 큰 아들의 실직이라는 염려까지 보태버렸다.       


일요일 아침이다. 교회 새신자 모임 담당자로부터 처음 교회에 오신 분들에게 친절하게 신앙을 소개해주는 모임에 기존 신앙인 대표로 좀 참석해달라고 부탁이 온다. 지금 신앙을 소개해줄 만한 친절함이 없는데, 실직당하고 지금 있던 신앙도 없어질 것 같은데 남들 신앙까지 내가 어떻게 고려하나, 정중하게 요청을 사양한다. 그런데 새롭게 신앙을 가지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믿으면 인생이 아름다워요. 만사형통해요” 하는 것보다 신앙 생활이란 게 굉장히 어렵고, 장밋빛 환상 같지도 않은 면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다만, 그런 소리는 새로 교회 온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을 텐데 그렇다고 ‘신앙을 가지면 인생이 아름다워’를 연발하는 게 거짓말 일텐데. 신앙을 가지는 게 정말 좋은 일인가?, 신앙의 선배라면 신자에게 적확한 사실을 주지하는 걸 고려해야 하지 않나. 물론, 내가 실직했다고 속상해서 나오는 한풀이와 신앙 생활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은 구분해야겠지만, 만약 직장 잘 다니고 소득도 늘어나고, 승진하고 그랬다면, 오히려 새신자 모임에 나가서 예수 잘 믿으면 이렇더라 하고 또 다른 신앙의 단면을 떠들고 있지 않았을까. 모임에 나가지 않겠다고 사양했던 결정을 바꿔 나가야겠다고 담당자에게 연락해야겠다.      


교회에서 한 장로님과 잠깐 대화를 나누는데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시키려고 자네를 이리 연단하나?”며 실직을 신의 계획으로 까지 승화시켜 위로한다. 이제 34살, 취업해서 한창 성과 낼 때인데 이런 위로를 받고 있다니. 요즘 교회 가기 싫은 게 주변 사람들은 염려와 안쓰러운 표정을 건네는 데, 이게 내 처지를 위로하려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막상 자기들도 별 대책 없으면서 응당 해야 할 처세인 마냥 위로를 건네는 게 정작 위로받는 상대의 마음을 고려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암수술하고 돌아온 환자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가 역설적으로 건강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한편, 물어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게 가장 적절한 안부 인사라고 생각할 테니. 듣기 싫은 소리 한다고 남 탓할 게 아니라 그 상황에 있는 것 자체가 괴로운 것이겠지. 위로 때문에 마음 불편해지는 걸 어찌 누구 탓할 수 있겠나.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예전에는 주말에나 집에 있었지, 이제는 식사, 커피, 샤워 등 모든 게 집에서 이뤄진다. 그러다 보니 늘어나는 건 쓰레기다. 일주일 한번 비웠던 쓰레기통을 이젠 이삼일에 한 번씩 비워야 한다. 집 청소에 신경을 써야 한다. 또, 오래된 주택에서 나오는 라돈(Radon)이 폐암을 유발한다는데 하루 종일 방에 누워있으니 라돈을 온몸으로 흡수하고 있는 중이다. 실직자는 1급 발암물질과 함께 살고, 속도 썩어가니 암에 걸릴 확률이 훨씬 높을 게다. 라돈 피해 미용실로 간다.     

  

“머리카락이 너무 강해 손이 욱신거려요.”

한참 가위질하던 미용사가 손 엄지와 검지에서 가위를 빼면서 하소연한다. 욱신거리는 손을 주무르며, 미용 실습생 때 손 아프게 연습하던 기억이 떠올라 덕분에 읽은 초심을 찾았다며 나보고 고맙단다.      

“초심은 잃게 마련이지요. 중심을 잡으세요. 그럼 선생님은 선생님의 이름이 걸린 미용실을 차릴 수 있을 겁니다.” 

장자의 선문답 같은 대화를 마치고 나선다. 베테랑 미용사가 초심을 찾을 정도로 굵은 머리카락, 손이 아플 정도로 깎아봐야 짧은 스포츠머리다.      


이해할 수 없다. 젊은 나이에 실직이라니. 조물주가 한 피조물의 인생에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연단시키려고 이런 상황으로 어떤 방향으로 조정해 개선을 원하는 가. 조물주는 창조 이후에도 끊임없이 피조물의 인생에 개입한단 말인가. 그럼 이 상황을 열렬히 환영해야, 존중하며,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하나. 신께서 내 인생에 여전히 개입하고 있다는 건데, 정말 힘들다. 왜 하필 나에게? 왜 나만 가지고 이러나 불만이 튀어나온다. 불만만 튀어나온다.      


송강호 주연의 영화 <변호인>에서 주인공 송우석 변호사의 실재 소제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 세금 관련 송무로 떼돈 벌며 행복하게 지내는 기간은 딱 1년이다. 이후 민주화 관련 사건을 맡으며 엄청 고생한다. 당신의 돈을 지켜주겠다던 속물 변호사는 ‘변화’할만한 한 사건을 만나고, 손해 보면서도 해야 할 일, 할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변한다. 비견할 바 아니지만, 예상하지 못한 ‘실직’이라는 사건을 만나 그동안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이 변해야 하는 건가. 직장 다니며 혼자만의 이익을 목적으로 살고, 돈을 어떻게 더 벌어야 하고, 번 돈을 다시 불려 가고 소득에만 종속된 게, 신앙인 차원에서, 조물주 입장에선 뭔가 못마땅한 구석이 있었나? 아니, 근로자가 그렇게 소득을 추구하는 게 나쁜 건가. 혹시, 사익이 아니라 공익적인 일을 하길 원하는 건가? 그런 차원에선 내 직장 생활에 어느 정도 공익적인 비중이 있었음에도 내 태도는 그리 공익적이지 못했다. 실직 덕분에 소명에 갑자기 공익을 고려하는 점프를 하게 된다. 친구 김성한에게 이런 생각을 말해보니, “그냥 회사에서 짤린 거 아닌가” 하는 차원으로 신앙 차원의 점프를 짤라버린다. 신앙도 별로 좋지 못하면서 괜히 매사에 신적 차원을 개입시켜 해석하면 오히려 신앙에 오해만 쌓인단다. 직업 시장에서 실직하게 된 빈번한 일이 네게도 일어난 것이란다.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라면 ‘왜 하필 나에게?’라는 물음을 파괴한다. 사안에 대해 찬찬히 정리해보려는 데, 정리될지, 이미 정리된 것인지, 정리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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