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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Dec 16. 2018

사색22. 드디어 뿌듯한 하루

3월 14일(금)

여전히 늦잠으로 오전을 날린다. 눈 뜨기 싫다. 실직자인 현실에서 꿈나라로 도망치려는 자생적인 본능인가. 늦잠 잔 걸 공포, 무의식, 본능을 들먹이면서까지 변명거리를 찾는다.       


이번에 책 100권을 읽자. 집 안에 있는 모든 책을 다 뒤져서 딱 100권을 고른다. 책장 제일 위 첫째 칸으로 100권을 옮겨 놓는다. 이걸 다 읽자. 왜 읽는 진 모르겠다. 나중에 써먹을 일이 있거나, 아니면 무료한 하루를 채우는, 여튼 이 현실에서 책 속으로 도망가는 거다. 가장 먼저 읽을 책은 고미야 가즈요시의 <1초 만에 재무제표 읽는 법:실전편>이다. 재무제표, 돈 주고 배운 걸 까먹지 않으려 선택한다. 보던 책을 계속 보는 건 지겨워서 진도가 안 나가고, 원론서 수준의 다른 책을 골라 보는 거다. 재무제표를 직접 작성하는 것까진 어렵고, 원론서 수준을 반복해서 보는 것으로 감을 놓치지 말자.      


독서 스타일이, 두세 권 펼쳐 놓고 각 책의 챕터별로 둘러본다. 소설이 아니면 한 권만 정독할 집중력도 없고, 보다가 관련된 뭔가 생각나면 그걸 찾기 위해 다른 책을 보며 우왕좌왕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다. 그러면 책 한 권이 말해주지 못하는 종합적인 틀을 가질 수 있다. 방, 책상, 침대, 화장실, 식탁 곳곳에 책이 펼쳐져 있다. 지금 재무 책과 함께 보려는 책은 김용익 외 공저의 <의료관리>이다. 최근 의사들이 진료별 의료 수가를 새로 설정하는 데 수가 관리자인 정부와 소비자(환자, 잠재적 환자), 그리고 의료 서비스 제공으로 수익을 얻는 의사(의료인)의 갈등이 연일 신문,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과연 의료 수가 란게 무엇인지, 병원은 건강보험, 국가 재정으로 이뤄지는 것이니 병원 회계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궁금하다. 이 책이 병원의 재무적인 점에 대해서까지 소개해줄지 모르겠지만, 전문 의사들이 ‘관리론’을 테마로 책을 쓴 건 처음 아닐까. 수술이나 진료만 할 줄 알았던 의사들이 정책, 관리 분야 책을 써냈게 꽤나 업적으로 보인다. 사명을 가지고 이런 교과서 같은 책을 만들었거나, 아니면 의사가 의사 일이 재미없어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거나.      


아침 식사는 늦잠 자느라 대부분 건너뛰고, 점심, 저녁을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운다. 이런 정크 푸드를 매일 계속 먹어도 되는지, 어머니께서 알면 난리 날 텐데. 지금 지출하는 소비의 주요 항목은 대부분 식사 값이니 엥갤 지수가 엄청 높을 것이다. 회사 다닐 때는 내가 밥값 계산할 일이 별로 없지만 집에 혼자 있으면 나가는 돈은 대부분 밥값이다. 편의점 도시락은 식당 밥값보다 1500원 정도 싸다. 당장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궁상떨고 있는 건가. 한 달 동안 매끼마다 1500원을 줄일 수 있다면 궁상떠는 게 자연스러운 행태이기도 하다. 밥을 해 먹는 게 훨씬 쌀 텐데. 집 밥을 시작해야 하나. 직장 생활한답시고 요리 도구 하나 없다. 주방용품 한번 살펴봐야겠다. 좋은 음식을 잘 먹어야 건강해진다. 하지만 무소득자는 나중에 다가올 건강문제보다 당장 1500원 절약하는 인센티브에 더 반응하게 된다. 1500원에 무너지지 않을 실직자가 있나. 궁핍할수록 미래의 가격은 더 싸진다. 저소득층의 미래는 얼마나 싸구려가 됐을까.       


집 앞에 세탁소가 새로 생겼다. 이전 단골 세탁소보다 몇 걸음 더 가깝다. 고작 몇 걸음 때문에 단골가게를 버리고 새로 생긴 세탁소로 옮겨간다. 냉혹하다. 세탁 서비스 이용에 공급자와의 친분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겨울 코트, 양복 세 벌과 와이셔츠를 맡긴다. 다시 양복 입을 날이 올까. 추운 계절이 다시 오면 코트와 양복을 입고 출근하고 있을까. 그러고 싶다. 세탁해 놓자. 세탁소에 옷을 맡기고 집으로 가는 길이 춥다. 실직 후 처음으로 정신 차린 하루를 보낸 듯하다. 뿌듯하면서도 허무하다. 내일은 주말이다. 실직자에게 평일과 주말의 차이가 있나. 여전히 돈 안 드는 도서관이나 가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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