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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Dec 20. 2018

사색26. 배신과 용서

3월 18일(화)

점심을 교회 동생 김효현과 먹는다. 알탕, 불고기덮밥 서로 주문한 음식 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예술과 하나님 이란 대화를 시작한다. 예술과 하나님 이란 대화라니, 교회 동생 아닌가. 최근 본 영화 <달라스 바이어스>에서 주인공은 에이즈 걸린 환자가 되고 보니 그동안 부정하던 동성애자를 자기 같은 소수의 처지로 이해의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된다. 확신하던 부정의가 막상 처지가 비슷해지니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 포함된다. 기준, 확신이라는 게 내가 지금 서 있는 곳,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이뤄진 것이라면, 내 위치의 변화에 따라 그것들도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내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도록 절대적 기준, 가치를 요구하며, 그것을 변화하는 내 삶의 변하지 않는 기준이 되기를 요구하며, 그 요구를 이행, 실천한 사람을 ‘성인’이라 한다. 비단 종교 영역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지킨 사람을 신념에 충실한 인물이라 하고, 사람들은 추앙한다. 동성애에 대해 맞다 틀리다 차원으로 접근한다면 특정 종교에서는 절대 틀렸다 라는 정답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영화처럼 각자 처한 상황에 따르면 어떠한 정답이 절대적 정의로서 사람들의 삶에서 정답을 실천하는 형태로 나타날지는 회의적이다. 현대 한국 교회가 동성애에 대한 극단적인 확신과 정답을 주장하는데, 나는 그 형태가 친절, 사랑, 포용하는 태도를 찾아볼 수 없는 게 오히려 비기독교적인 모습으로 보인다. 이미 알고 있는 정답을 강요하기보다, 이해할 수 있게 접근하게 만드는 게 더 성숙한 자세일 것이다. 한편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믿음이 외려 대단하고, 부럽기도 하다.      


성경에서 예수의 삶 역시, 개인의 예술적 경지를 볼 수 있다. 인류를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는다는, 33살 젊은 날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한계가 없는 사랑이야 말로 예술의 경지 아닐까. 경지에 이른 예술가의 작품에서도 예수의 희생 같은 사랑을 볼 수 있다. 말년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제작한 영화 <그랜토리노>는 기독교적 소재가 전혀 아닌데도,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타인을 위한 희생, 혈연도 아닌 이민자를 위해 자신이 대신 죽어 문제를 해결하는, 희생, 사랑의 가치를 말하고자 한다. 영화 마지막 장면 쓰러진 주인공이 누워있는 자세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예수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물론 여러 소재에서 하나님의 아이디어를 찾는 데는 교인들끼리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개인적 감동에 대한 해석을 서로 검증할 필요가 있다. 혹시 이교도적인 것에서 하나님의 개념을 찾는 것도 실수라고 하니까. 어떻게 보면 신앙이라는 게 수학 문제 푸는 것 같다. 내가 적용한 공식으로 열심히 풀어서 맞는 답을 냈는데, 나중에 친구들하고 맞춰보니 전혀 엉뚱한 답을 냈더라. 확신한 정답이라고 생각할수록 서로 답을 맞혀봐야 하겠더라.       


저녁을 먹으러 도서관 앞 학생 식당으로 간다. 졸업한 지 좀 됐는데, 혹시 후배들을 만날까 후드를 쓰고 고개를 숙인다. 학생이면 2500원, 외부인이면 4000원으로 밥값을 차별한다. 예전에는 그냥 하나의 밥값이었는데, 싸고 음식이 좋으니 택시 기사들이 여기까지 와서 식사를 했다. 노동으로 허기짐을 채우려는 양과, 강의실이나 도서관에서 앉아있다 때에 따라먹는 양, 곧 노동자들의 양이 학생들의 밥을 침식하기 시작했다. 학생 식당인데 결국 학생 먹을 밥이 모자라 외부인을 가격으로 차별하게 됐다. 학생일 땐 택시 기사들이 여기까지 와서 우리 밥을 먹어 쓰나 하며 가장 효과적인 가격 차별 정책을 시행한 학교본부에 박수를 보냈는데, 이제 ‘외부인’으로 차별당해보니 1500원 더 낸 다는 게 보통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같은 밥인데 1500원이나 더 줘야 하다니, 더구나 한때 여기 적을 두던 학생인데, 학교 발전 기금도 기부했었는데. 다음에는 책상 서랍 구석 어디에 있을 학생증을 가져올 테다. 거짓으로 학생증을 내밀며 학생 인척 파렴치한 짓이지만 1500원에 내 체면을 판다. 이제사 내 체면에 큰돈들이지 않겠다. 실직자 주제에. 어제저녁 샤워하면서 문득 김치찌개가 먹고 싶었다. 그런데 식당 저녁 메뉴에 두둥 하고 김치찌개가 있지 않나. 필연 같은 우연을 마주하면 ‘하나님이 내 소원을 들으셨다’고 내 생활에 개입하는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으로 점프한다. 어제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는 것과 저녁 메뉴로 나온 김치찌개는 서로 관련이 없이 독립적인 사건인데, 같은 김치찌개라는 것으로 내 기도가 이뤄졌다는 인과관계로, 더욱 신앙을 곤고히 해버리는 소재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우연 같은 필연은, 즉 행운은 감사할 일인데, 실직 같이 불행한 사건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내가 뭔가 잘못해서 신의 분노를 사서 억울한 일이 일어났나? 그 뭔가를 찾아 반성해서 이 불행을 끝내야 하나. 신앙생활이란 게 이런 우연의 원인을 탐색하는 일인가.     

 

다시 도서관으로 간다. 로버트 엑셀로드의 <협력의 진화>를 읽는다. 대등한 양자 간에는 어떻게 서로 돕는 협력이 나타날 수 있을까. 협력에 대한 대표적인 이론으로 게임이론, 이를 전제로 배신이냐 협력이냐 각각 전략을 가진 컴퓨터 프로그램들의 1:1 대결 결과를 분석한 내용이다. 내가 실직한 일을 게임이론으로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로 풀어보면, 두 명의 경기자가 서로 협력한다면 각 3점씩 해서 총 6점이고, 둘 중에 한 명이 배신하면 배신한 놈만 5점을 가져가고 배신당한 놈은 0점으로 총 5점, 둘 다 배신하면 각각 1점으로 총 2점이다. 자, 나를 짜른 사장이, 사장과 내가 대등한 입장은 아니지만 그 바닥에서 앞으로 어떻게 든 서로 만나 협력할 일이 있다면 사장이 날 짜른(배신) 것처럼 나도 배신으로 대응해, 배신에는 배신할 것이다. 지난 게임에서는 사장이 배신해서 5점을 가져갔지만 다음 기회에 서로 만나서 협력할 일이 있을 때는 내가 먼저 배신해서 5점을 내가 챙기겠다. 아, 비현실적이다. 아니, 이론이니까 상상을, 상상만이라도 해보자. 그러고 보니 사장이 경제학과 출신이었다. 사장은 이 바닥에서 근로자에 불과한 나를 다시 만날 일 없고, 한 번의 게임으로 관계가 끝날 것이니 배신이 본인에게 남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실천한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나에게 한 말이 ‘우리 성공해서 만나요’ 하지 않았나. 내가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 역시 고려한 것이었나.      


<협력의 진화>는 대학원 때 읽은 책인데, 다시 봐도 ‘협력’을 하는 선택과 결정에 대한 개인의 동기를 잘 분석했다. 예전에 읽을 땐 규범적으로 설명한 것만 읽었는데, 이번에는 놀고 있으니 시간 많아, 선택하는 것을 수리적으로 설명한 것까지 일일이 풀어보며 계산해본다. 책에서 말하는 최선의 협력 전략은 팃포탯(tit for tat)이다. 상대가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 배신하고, 거기에 나도 배신으로 대응하면 배신을 하는 개인의 이익은 있다. 그러나 배신 대 배신으로 연속한다면, 그런 개인으로 구성된 사회는 서로 협력이 일어날 리가 없어 전체적인 이익(6점)이 드물어진다. 또한 관계에서 배신이 계속 이어지면 협상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 사회는 없어져, 다시 말해 그 종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사라진다. 책은 종의 차원으로 까지 위협적인 배신의 고리를 끊는 것으로, 서늘한 수리경제학 이론서에서 찾기 어려운 ‘용서’, 상대의 배반에 용서로 대응하라는 놀라운 개념이 등장한다. 배신-배신의 대응은 협력의 장이 사라져 그 공동체, 사회, 심지어 종은 사라진다. 개인의 이익에 따른 선택이 종의 위협으로 나타나는 배신 대 배신을 깨는 부수는 게 용서라고. 한번 시작된 배신에는 결국 누가 먼저 ‘용서’를 해야 한다고, 경제학 책 같지 않게, 아니 오히려 가장 경제적인가?, 마치 성경의 화두인 용서의 중요성을 도출한다. 그런데 대등한 상대 간의 관계에서 누가 먼저 용서하자는 제안은 이해가 가는데, 만약 협상의 대상이 대등하지 않고 상하가 있다면 밑에 있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협력하거나, 배신을 당해도 먼저 용서할 수밖에 없지 않나. 특히 사업장에서 고용인과 피고용인 관계는 상하관계 일 수밖에 없을 텐데, 노조 같은 것도 대등한 입지를 만들기 위해 기능하겠지만. 그러나 근로자가 대등관계로 근로계약을 하는 것은 천국에서나 있을 법한 일 아닐까. 천국에도 근로가 있으려나.      


출처: https://www.wikiart.org/en/lucian-freud/john-minton-1952


그림은 루치안 프로이트의 <존 민턴 초상화(1952)>이다. 그림 속 남자의 얼굴은, 건강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병들어 있는 것 같다. 초점 없는 눈동자, 열린 입, 푸르뎅뎅한 빛이 도는 얼굴색은 내면의 공허함을 보여주고 있다. 초상화의 주인공인 민턴은 이후 알코올 중독, 우울증을 겪다가 자살했다는 설명이 있다. 살벌하다. 그림이 한 개인의 심리를 이렇게 적확하게 표현했다니. 흠칫, 혹시 지금 내 얼굴을 그린다면 민턴이랑 크게 다를 게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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