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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Jan 06. 2019

사색34. 용서의 가치

3월 26일(수)

아침, 구약 성경 창세기를 펼친다. 평생 자식 하나를 달라고 빌었던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는 90세가 넘어 아들 하나 낳는다. 오래전부터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한 하나님, 그렇게 약속은 이뤄진다. 이걸 ‘약속이 이뤄졌다’라고 말할 수 있나. 평생을 기다린 노부부의 인내를 생각하면, 속이 다 타서 시커먼 재만 남았을 듯한데, 아니, 겸손했을까? 마침 어머니께서 아침 식탁에 놓아둔 메모는 신약 성경 로마서에서 바울이 아브라함에 대해 ‘그는 하나님을 믿는 의로움 뿐’이라고 높이 평가하는 구절이다. 기다림 속에서 만나는 고난, 거기에서 발현하는 성품과 의로움에서 희망이 나온단다. 말은 쉬워도, 이걸 지금 나의 실직 상황에 대입하려는데 보통 어려운 일 아니다.  

     

휴대폰 벨이 울린다. 제수씨 강진원의 전화번호가 화면에 뜬다. 전화를 받으니 네 살짜리 조카 해동이가 “삼촌” 하고 인사한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현동(동생)은 오늘 목이 아파서 어린이집에 안 갔어요”라고 상황을 정확한 표현으로 말한다. 단어와 단어 정도 말하던 녀석이 제대로 된 문장을 구사한다. 시간이 흐르며 시기에 맞는 성장을 보여준다. 신기하고, 감사하다.      


비가 내린다. 부산이라서 3월 말인데 공기 중에 벌써 약간의 더위를 동반한 듯하다. 온천천 카페 거리에는 벚꽃이 피기 시작한다.     


뭐하고 지내냐, 대학원 시절 한 선배로부터 전화가 온다. 몇 년 만에 연락 와서 건네는 인사가 ‘뭐하고 지내냐’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고향집에 내려와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예상밖에 대답, 본인도 회사 그만뒀단다. 왜?!, 정말 뭘 해야 할까 고민하다 내린 결론이 사직이란다. 대기업을 다니다가 그만두다니 현재 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나’라는 건 누구나 아직까지 고민하나 보다. 그만둔다는 사람들 소식을 들으니 연대감이 들어 반갑기도 하다. 지인의 실직이 반갑다니, 실직자는 남들 좋지 못한 소식도 반가운, 사람 찌질하게 만든다.      


다시 로버트 엑셀로드의 <협력의 진화>를 펼친다. 배신에는 배신이라던 팃포탯(tit for tat) 전략을 강조하던 책은 중반이 지나면서 '용서', 상대방의 배신에 협력으로 대응해야 할 필요를 말한다. 배신에 배신으로 대응해 한번 시작된 배신으로 서로 배신만 하다가는 아무런 교류가 일어 나지 않아 그 공동체가, 심지어는 종(種)이 사라진다는, 개인의 선택이 공동체의 연속성으로 확대된단다. 단기적으로는 배신에는 배신이 필요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배신을 용서하는, 용서의 가치를 강조한다. 컴퓨터로 프로그램을 돌려서 나온 계산적인 책인데 용서의 가치를 주장하는 걸 보면 놀랍다. 신앙에서 말하는 가장 중요한 게 용서 아닌가. 개인의 이익을 높이기 위한 경제적 전략적인 용서일 수 있다(<협력의 진화>에서는 팃포탯 보다 팃포 two탯이 협력을 위한 최고의 전략이라고 하며, 또 신사적인 전략, 즉 배신을 잘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함). 신앙에서 말하는 용서는 용서 그 자체가 목적이다. 용서한 대상으로부터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는, 다음에 또 만날 것을 고려하지 않는 그 순간의 용서이다.     


저녁에는 어머니가 월급날이라며 양념치킨을 먹잔다. 가끔은 밤에 이런 야식도 먹고 싶은데 혼자선 시킬 엄두가 나지 않는단다. 배달 온 치킨은 요즘 치킨 같지 않고, 어릴 적 재래시장에서 만든 것 같이 촌스런 양념통닭이다. 찐득찐득한 매콤 달콤 소스가 맛있다. 어머니는 한참을 잘 먹다가, 이 가게 통닭의 밀가루 튀김 두께가 이전보다 훨씬 두꺼워졌다며 오늘이 마지막으로 다음부터는 순살만 구워주는 치킨가게로 바꾸겠다고 하신다. 어머니를 앞에 두고 대화를 하면서도 이러고 있어야 하나, 앞으로도 계속 이러고 있는 거 아닐까 불안감이 순간 짧게 내 시야를 가리며 정신이 잠깐 다운됐다가 돌아온다. 기면증 같은 건 아니지만 이런 게 반복하면 기운이 모조리 빠진다.       


아침 눈뜰 때 내리던 비는 저녁 눈 감을 때까지 내린다. 오늘은 집에만 있는다. 여전히 덜컥 덜컥 두렵다. 몇 군데 이력서를 넣은 곳에서는 어떤 반응이 올까, 이력서가 괜찮았을까, 반응이나 있을까. 가장 잘 기다리는 방법은 기다리는 줄 모르고 기다리는 것인데, 어떻게 기다리는 줄 모를 수가 있나. 놀고만 있지 말고 아르바이트를 해볼까. 뭘 좀 배우러 학원을 다녀볼까? 모처럼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게 행복하기도 한데, 만약 고향에 다시 돌아온다면 여기에서 내가 할 일이 있을까 싶은데. 내일은 훌쩍 바람맞으러 어디 갈까 보다. 간다면 어디로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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