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창우 Jan 10. 2019

사색37. 손님

3월 29일(토)

토요일 아침, 어머니는 해운대에 있는 큰 교회에서 운영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 클리닉 프로그램에 간다. 자식이 결혼하면 시어머니는 며느리와 가족 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될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관계 역시 훈련, 학습, 경험이 필요한 것. 가족관계 형성 훈련을 교회 같은 데서 외주로 제공하는 게 신기하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서로 잘 모르면서 단지 내 아들과 결혼해서, 내 남편을 낳아줘서 ‘관계’가 이뤄진 것이다. 특히 관념, 편견으로 시작하는 이 관계는 선입견, 자신의 일방적인 정보만 강요하다간 곪을 수밖에 없다. 고부(姑婦) 관계는 부부가 결혼하려고 서로에게 애쓴 만큼 새로운 관계 형성에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결코, 내 딸 같지 않은데 딸 같이 대하려니, 내 어머니 같지 않은데 어머니로 대하려니 틀어질 수밖에 없다. 어머니께 프로그램에서 그동안 뭘 배웠냐 하니 며느리는 아들이 집에 데려온 잘 대해줘야 할 ‘손님’으로 설정해야 하고, 아들도 곧 손님 따라 집을 나갈 '손님'으로 설정해야 한단다.  서늘하지만 적절한 포지셔닝이라 그런 설정에 감탄을 한다.      


내가 나를 알아보는 법은 내가 ‘나는 어떠한 사람이다’ 하는 것과 타인이 ‘넌 이런 놈이야 임마’하는 걸 비교하며 알 수 있다. 주변에 나에 대해서 물어보라. 나이가 서른이 넘으면 남들이 나를 잘 몰라 저런 소리하는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이 나에 대해 하는 말이 보통의 나를 말하는 것, 남들이 어떻다 하는 게 사실 나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어렵겠지만 서로 솔직히, 대화하면서 자신을 알 수 있다. 

또, 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어떤 상황에서 그 상황을 다루는 나를 보며, 내가 어떤지, 어떤 인간인지 알 수 있다. 홍대 앞에 있는 방탈출 게임 방에 가보면, 가정이지만 극한의 상황에 있는 방에 갇힌 나를, 우리를 보면 성격을 잘 알게 된다. 직장에서 같은 부서원들끼리 거길 가보면 확실히 서로를 알게 된다. 결국 내가 나를 아는 방법은 주변의 관계와 오늘 내게 주어진 상황이 나를 알 수 있게 하는 최고의 재료 아닌가. 시어머니에게 며느리, 나에게 실직은 또 한 조각의 나를 알 수 있게 돕는 최고의 학습재이다.      


비가 내린다. 오늘 서울로 떠난다. 이른 저녁을 먹고 저녁 7시 반 기차에 맞춰 집을 나선다. 현관을 나서기 직전 거실에서 내가 주로 앉아 성경을 보던, 커피를 마시던, 기도하던 자리를 보며 살면서 자의든 타의든 이렇게 집중해서 처한 상황에 고민하고, 묵상하고, 인생의 의미를 곱씹은 걸 생각해본다. 저 자리에 앉아서 고민한 시간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명쾌하게 어떤 지침을, 시원한 해답을 얻은 것은 없다. 이런 물음과 고민, 앞으로 있을 실직기간, 실직을 끝내고 나서도 계속 이어가야 할 필수재 같은 것이다. 아니 실직에 따른 선택재인가? 여하튼 필수적인 고찰 없이 그동안 얼마나 허둥지둥 살았나.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머니는 덕분에 아버지 기일을 앞둔 힘든 시간을 잘 버텼다며 고맙다고 하신다. 나 밥상 차려주는 게 슬슬 힘들어지더란다. 오래 있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올라가야 한다는 장성한 자식 또한 손님이렷다. 어머니는 어느새 손님맞이, 배웅에 익숙해진 듯하다. 클리닉 프로그램 때문인가.        


부산역으로 가는 택시 안, 창을 때리는 비를 보며 그동안 부산에서 서울 가는 길에 비가 온 적 있나 기억을 더듬어본다. 처음인 것 같다. 내 이름의 ‘우’가 비우(雨)라서 이름값을 하는 건지, 아니면 서울로 멀리 면접하러 가는 길, 비를 내려 축복하는 건지, 날씨와 내 기분의 우연을 필연으로 승화시키려는 본능, 때에 따라 내려야 할 봄비를 보면서도 내 의지를 개입시킨다.      


서울로 가는 기차, 면접이라는 긍정적인 신호에 벌써 샴페인을 터트릴 것 같은 기분이다. 아니, 이제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자세’를 모색하려 마음을 가다듬는다. 물론, 고향집 방에서 막연히 있기보다 면접하러 간다는 게 기쁘다. 이 기쁨의 근원이 정확히 뭔지는 잘 모르겠다. 기쁨은 자생적으로 생긴 다기보다 기뻐할 일이 생겨야 파생하는 감정 아닐까. 기쁠 일도 없는 데 어찌 기뻐할까. 감사할 일도 없는데 어찌 감사할까. 무엇을 기뻐해야 하고, 무엇을 감사해야 하나. 좋은 일에 기뻐해야 할까. 이미 있는 것에서 기뻐해야 할까. 면접 보러 가는 길이 기쁜데 실직을 끝내고 다시 취직하게 되면 얼마나 기쁠까.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기쁜데 면접 보고 떨어지면 얼마나 슬플까.      


서울살이 10년, 어느 순간 서울이라는 공간에 대한 긴장감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엄청난 용기를 가지고 나서야 했던 곳이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다. 고향, 그리고 또 하나의 집, 서울집. 정확하게는 집이 아니라 ‘방’이겠지. 기차 타고 두 시간 좀 지나 서울역에 내려 익숙한 번호의 버스를 타고 방에 도착해 짐을 풀고 날이 세면 밝아오는 서울 내방의 조도까지, 그렇게 내 공간이 아닐 것만 같던 곳이 익숙하다. 익숙하되 긴장해야겠다. 이제는 구직을 하는, 둔감해지지는 생활이 되지 않으려는 자세다. 익숙한 것에 만족할 수 없다. 물론, 집에선 안락함을 누리며 쉬어야 하는 곳이지만, 나는 지금 실직자 아닌가. 집에서 안락한 것도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고향 부산에서 계속 살았다면, 실직을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인생에 대한 고민을 다뤘을까. 실직을 하고 나서 여러 고민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지만, 실직을 안 했다면 이런 사색을 할 기회, 할 수도 있을까. 행복하다면 사색이 필요하나. 어머니는 괜히 서울에 보냈다고 후회하고 계시지만, 안락한 고향집은 인생의 고민, 묵상을 할 환경을 제공할 수 있었을까. 성경 창세기에 아브라함도 평생을 타향살이했는데, 덕분에 창세기 같은 내 역사서 창우실직서챕터가 생긴 것인가.      


서울역에서 내방으로 가는 버스에서 기도한다. 지혜를 달라고, 인생, 앞으로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 지금은 아무런 지혜가 없어 불안하다고. 불안해서 그동안 지식을 쌓고, 정보를 취하고, 돈을 모으며 살았는데 지식이 아닌 지혜가 필요하다고. 성경에서 솔로몬이 금보다 지혜라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기도를 해본다. 앞으로 그 지혜로 살아내겠다고. 우선 지혜로 오는 월요일의 면접을 보겠다고. 한참을 기도하다 눈을 떠보니 익숙하지 않은 길이 버스 창밖으로 보인다. 앗, 버스를 잘못 탔다. 서울은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곳인가. 생각에 빠져 버스 넘버를 잘못 본 실수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사색36. Saved by the Bell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