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창우 Jan 14. 2019

사색39. 1쪽

3월 31일(월)

면접, 생각처럼 긴장하진 않는다. 우연스러운 사건과 필연적인 계획, 이 둘 사이에 관계있다는 미약한 확신이 있어 그런지 모르겠다. 우연에 필연을 집어넣는 신앙이 생겼나 보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요구한 데로 자기 아들 이삭을 제사 제물로 바치는 장면이 나온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아들 이삭과 함께 제단이 있는 산으로 떠난다. 아들을 죽이러 가는 일, 정말 하기 싫은 일인데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한다’는 성실함을 볼 수 있다. 그것까지 성실할 수 있다니 도대체 뭘 믿었던 걸까.   

     

이번에 면접 보는 자리는 이전보다 높은 직급이다. 그동안 늘 해봄직한 자리이다. 설마 승진되려고 짤린 건가, 우연 같은 상황에 조작적인 필연을 해석해본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자연스럽고, 본능이기도 하다. 갑자기 짤려서 고생한 게 승진하려는 신의 계획이었다는 승화가, 아니 작위적인 투영에 가깝다. 다만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경우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 창세기의 아브라함을 재현할 수 있는 믿음의 시험이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난 그럴 자신이 없다.      


면접장 가는 길, 길가에는 벚꽃이 만개해 있다. 이상 기후인가 예년보다 보름 정도 일찍 꽃이 핀 듯하다. 기후도, 마음도 이상하다. 면접을 시작한다. 제출한 지원서를 기초로 어디 출신이시네요, 이걸 전공하셨네, 예전에 거기에서 일하던 분위기는 어땠나요? 이런저런 시답지 않은 대화로 시작한다. 경력직 면접의 묘미는 구직자, 인사담당자 서로 신입 직원 면접같이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임하면서도 분위기는 경직되지 않고 느슨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느슨함에 빠져버리지 말고 여유로움 속에서 날카로움을 보여야 한다. 면접은 초반을 지나 느슨함은 사라지고 본론이 나온다. 지원 서류 중 작성한 에세이가 있었는데 내 에세이에 논리적 구멍이 있다고, 이력서로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그게 에세이에서는 나타나지 않아 조금 실망했다고 하더라. 에세이는 나 역시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채용 공고에서 특정 주제에 대한 에세이를 1쪽짜리로 요구했다. 1쪽짜리에 의견을 쓰라는 게 말이 되나. 1쪽으로 뭘 어떻게 파악할 수 있나. 그러나 구직에서는 면접관이 요구하는 그 어떤 제한에도 역량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실패한 것이다.    

     

면접이라는 게 관상만 보고, 얼굴 잘 생겼네 일 잘하겠네 하며 정말 면접만 하고 마는 경우도 허다하다. 반면, 깊은 대화와 면접관이 사전에 지원서를 충분히 파악해 서로의 생각을 날카로운 칼로 조각조각 잘라보는 면접도 있다. 이번 면접에서 ‘기대한 것에 비해 실망이다’는 말을 듣고, 망했네 하며 낙심하지만, 설령 구직에 실패하더라도 농도 깊은 질의응답이라는 유익한 면접을 가졌다. 이번 자리가 사실 직전 직급보다 연봉이 2000만 원 더 많다. 탈락하더라도 그만큼 비싼 면접을 본 셈 치자.      


집에 돌아가는 길 기운이 한 톨도 없다. 면접을 잘 보지 못했다는 확신의 블랙홀에 정신과 육체가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피로감 속에 집까지 어떻게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머리엔 왁스를 발라 찐득찐득한데 씻지도 못하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내 생각과 달라’서 기운이 빠진다. 이번에는 될 줄 알았는데, 부산 고향집에서 이것 때문에 일찍 올라왔는데, 우연이 아니라 신이 준비해놓은 필연적인 기회라는 생각과 달리 면접을 잘 보지 못했다. 이번에 취직이 안 될 수 있다는 예감. 역시 산다는 건 생각처럼, 확신하는 것처럼 이뤄지지 않는구나. 

매거진의 이전글 사색38. 소득, 영양 균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