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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Jan 14. 2019

사색40. 실직을 만나다

4월 1일(화)

면접 당일과 면접을 본 다음날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어려운 일을 처리했으면 기분이 한결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하다. 어떤 결과를 기다리는 기다림 그 자체와 그 기다림의 목적인 결과, 이 둘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관계는 있을까? 찬송가에 보면 기다림에 대한 대표적인 은유로 ‘주와 같이 길 가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그걸 ‘즐거운 일 아닌가’라고 한다. 지금 주와 같이 길을 간다면, 어떤 결과를 있든 지금은 그 결과와 관계없이 즐거워야 하지 않나. 나의 기다림은 찬송가의 은유처럼 전혀 즐거운 일이 아니다. 찬송가에 실릴 정도의 신앙고백이니 굉장히 높은 수준의 신앙 일터 평소 흥얼흥얼 함부로 건방지게 불렀다.      


"야 무슨 일이야, 사무실 옮겼어? 회사에서 너 찾았는데, 없네?!"

모처럼 회사를 방문했다는 선배로부터 전화가 온다. 이렇고 저렇고 해서 실직 중이라고, 최근에 경력직 면접을 보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뭐 그런 시팔 놈이 다 있어. 다시 복귀해야지, 잘 견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장이 짤랐다는 걸 선배도 이해하지 못하겠단다. 또, 지난번과 어제 면접 본 회사 사장들 역시 악랄하기로 유명하다며 들어가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연락 오지 않는 게 차라리 잘된 거란다. 업계에서는 직원 평판뿐만 아니라 사장 평판도 있다. 고용주의 좋지 못한 평판을 들으니 출근하라고 연락 오지 않는 게 오히려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마음이란 게 참 웃기다. 

   

늦은 점심, 라면을 끓여 먹는다. TV를 틀어놓고 <SBS 힐링캠프 - 이지선(2013년 9월 9일 방송)>편을 다시 보기로 재생한다. 왜, 하필 이지선, 그녀의 이야기를 선택할까. 전신 화상을 당하고도 즐겁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이지선 스토리로 지금 내 처지가 그나마 낫다고 위안 삼아 힐링받고 싶었나? 라면을 먹으면서 보기에는 너무 무거울 그녀의 아픔, 감당할 자신 있을까 주저하지만, 방송 내내 유쾌한 농담과 웃음을 주도하면서, 그녀는 사고의 고통에 대해 “좋진 않죠”, “아프긴 했죠” 식으로 한 두 문장으로 끊어 말한다. 짧은 함축으로 고통을 승화시키지만, 듣는 이는 그 승화를 쉽게 따라가기 어렵다. 승화, 심지어 투영도 하기 힘든, 남일 이기만 할법한 화상이라는 고통. 이런 방송은 그녀의 승화에 무임승차할 뿐이다. 그걸 몰염치하게 ‘힐링’이라고 한다. 이런저런 힐링에 무임승차해 내가 지금 만난 어두운 터널 같은 상황을 지혜롭게 대응할 수만 있다면 오케이다. 지금 나는 이지선 씨만큼 지혜와 신앙으로 대응하고 있는 건가. 이 시기를 견딜 지혜를 탐색하고, 구하고 있나. 그냥 침대 속 잠으로만 도피하는 것으로 괴로운 시간을 회피하고 있지 않나.      


60분의 방송 중 기억 남는 이지선 씨의 여섯 가지 지혜는  

첫째, 그녀는 사고를 ‘만났다’고 한다. 왜 나에게 라는 접근은 상황을 대응하는 당시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사고는 누구라도, 나도 만날 수 있는 보편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내가 처한 실직자 상황은 여전히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접근이 불쑥불쑥 일어나지만, 통계청에 발표하는 실업률을 보면 실직이란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충분히 높은 가능성을 가졌다. 그렇다면 나도 ‘실직을 만났다’고 해야. 

둘째, 이지선 씨는 ‘왜, 나에게’라는 접근은 한편 그럼 다른 사람에게 일어났어야 한다는 이기적인 생각이란다. 여기서 신앙으로 승화하는데,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의 있고 없음이 사건 이후의 삶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이런 실직이란 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인지, 그런데 워낙 실직이 많으니까 과연 내가 감당하는 게, 다른 이와 비교해 유의미하게 변별력 있는 일인지 모르겠다. 

셋째, 터널이 끝나도, 또 터널이란다. 이지선 씨는 화상 수술 한두 차례 하고 나면 끝날 줄 알았는데, 남은 평생을 화상부위에 외과 수술을 하며 살아야 한단다. 그렇다면 터널이 끝나기를 바라는 게 목표가 아니라 터널 속을 어떻게 보내는 가가 중요한 문제. 터널의 끝이 아니라 터널 속에서. 

넷째,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 화상으로 눈꺼풀이 타서 없어지니 이마의 땀이 눈에 들어가서 얼마나 아픈지, 눈꺼풀이 있는 것에 감사하란다. 온몸이 다 타버린 사람도 감사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이건 정신승리를 위한 기제가 아니라 삶의 지혜, 앞선 세 번째 터널을 속에서 어떻게 하느냐 하는 지혜이다. 

다섯째, 자살을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한번 따져 보고 싶었다. 자살과 교회 중 교회를 선택했다고. 나도 교회 가서 따져 볼까. 그런데 요즘 대부분 교회는 예배 없는 시간에 문을 잠가놓는다. 누구든 와서 기도할 수 있는, 하나님과 따져볼 수 있는 기회의 보장보다 교회의 재산 보호가 우선한다. 최근 현대 사회에서 가파르게 올라가는 자살률과 한국 교회의 문단속과 상관관계가 유의미하게 있을 것 같다. 

여섯째, 죽을 수 없어서 살았단다. 아니, 살아보니까 살아지더란다. 삶은 버티는 것이라고. 라면을 먹다가, 그녀의 오밀조밀한 입에서 버티는 것이라는 말이 나오니 눈물을 흘린다. 컥컥 울면서 면발을 삼킨다. 울면서도 라면은 맛있다는 생각이 든다. 눈물 젖은 라면을 먹어본 적 있냐 는 신파를 떨기 보단, 라면은 울면서도 맛있는 훌륭한 음식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녀의 삶에 대응하는 자세가 참 놀랍다. 그녀는 나중에 정책을 구현하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그래서 지금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나도 지금은 놀고 있지만, 라면 한 그릇을 앞에 두고 텔레비전 화면의 그녀를 마주하고 있지만, 나중에 정책 현장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저녁을 먹고 여전히 면접을 잘 보지 못했다는 괴로운 마음에 방에서 나와 극장으로 가서 러셀 크로우 주연의 영화 <노아>를 본다. 영화는 '노아의 고민을 인간적으로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노아를 막연히 신의 명령에 따라 인류 처벌적 재난에 대비해 방주를 만들어 신인류의 시조가 됐다는 ‘우직한 수행자’로 알고 있었는데, 영화에서는 ‘옳고 그름’의 신적 정의와 판단에 따라 방주에 탈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판단의 노아, 신의 알려준 정의에 따른 선택과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의 선택, 그 차이 속에서 고민하는 노아를 러셀 크로우의 얼굴로 나타낸다. 특히, 노아가 홍수가 끝난 뒤 새로운 대륙을 찾아 정착하면서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자는 유명한 일화를, 이번 영화는 하나님의 정의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실패로 인한 죄책감, 그동안 방주 사업을 수행하는 게 심적으로 너무 힘들고, 아버지를 불신하는 가정이 되어 버려 알코올 중독이 됐다는 것으로 그린다. 흥미롭다. 성경에 나온 한두 줄의 문장과 그 행간으로부터 저런 인간적인 고민을 연출해내는 할리우드의 상상력은 흥미롭다. 그런데 이 영화 누가 볼까 모르겠다. 재미없고, 성경을 좋아하는 사람이 원전과 비교하려고 볼 텐데, 할리우드 제작사가 그린 성경 이야기를 기독교인들이 좋아할 리 없고.      


영화가 마치고 밤 11시 즈음 집으로 걷는다. 가는 길에 한 아주머니께서 절뚝거리시면서 양손에 짐을 들고 있다. 처음에는 짐이 그렇게 무거워 보이지 않아 지나쳤는데, 이전에 길을 찾는 할머니를 그냥 지나친 게 생각나, 그리고 또 최근에 면접도 봤는데 좋은 일하면 좋은 결과 있겠지 하는 맘도 있어, 저번에 길 찾는 할머니를 지나친 게 후회스러워 이번에는 도움주기를 실행해야겠다며 아주머니의 짐을 잡아든다. 아주머닌 사람 착하다며 요즘 여자들은 싹수없단 욕을 한다. 어찌 짐 들어주는 게 노년 여성의 젊은 여성 비하로 까지 이어질까. 나중에 헤어질 때는 날보고 꼭 대통령이 되라고 한다. 대통령이 되라니, 여전히 우리 아버지 어머니 세대는 최고로 훌륭한 잡이 대통령인가 보다. 나는 '네~' 하고 대답한다.

      

선함과 악함은 그 자체라기보다는 첫 선택이 파생하는 이어지는 선택, 그 이후 선택, 그 이후 선택, 선택, 선택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매 기회에 어떤 선택하는가, 어떤 선택으로 일관(계속)하는가가 선함과 악함을 규정한다. 영화에서 노아의 고민 역시 악한 인간에게 선함의 기회를 주는 선택에 대해서, 그걸 방주에 태워야 하나 마나를 가지고 가족과 갈등하는 것이다. 선택, 어떤 선택을 하는가, 사실 그것 역시 어떤 상황을 마주하면서 훈련하게 되는 on the job training의 대표적인 사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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