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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Feb 24. 2019

사색51. 결혼, 기적, 짜장면, 기쁨

4월 12일(토)

구약성경 창세기, 아브라함이 집종에게 멀리 타지로 가서 자신의 외아들 이삭의 아내감을 찾아오라고 부탁한다. 인류가 탄생했다는 대서사시 창세기의 마지막 사건은 아브라함 외아들의 결혼이다. 결혼, 개인의 인생에서 가장 인간적이며 신성한 선택이다. 특히 자식의 결혼은 본인의 결혼보다 더 마음 쓰이는 일이다. 자신은 결혼을 이미 해봤으니  아들아 너는 이런 여자와 살아야, 이런 여자와는 같이 살지 말아야 알려주려는, 심지어 골라주려는 욕구가 생긴다. 역설적이지만 그게 사랑이라 한다. 그렇게 자식의 결혼은 부모가 통제하기 어려운 일에 간섭하려는 본능적인 실수이다.     

  

결혼뿐만 아니라 직장을 구하는 것, 그리고 직장에서 해고당해 실직을 하는 것, 애기를 낳는 것, 부모님이나 아내, 자녀의 장례 같은 일은 내 영역 밖에 어떤 다른 차원의 통제가 간섭하는 게 아닐까. 바다에 가라앉은 배, 떨어지는 비행기를 슈퍼맨이 망토를 휘날리며 날아와 안전하게 구출해주는 게 기적일까. 어제 오늘 내일 같은 일상의 흐름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새로운 사건과 관계가 발생하고 그게 신뢰관계나 지혜의 실천으로 발전하는 게 기적 같은 일 아닐까. 이런 우연적인 사건으로부터 내가 모든 것을 예상하나에서 틀어진 예상, 계획에서 간섭, 안정, 유지를 기대하는 겸손함이 기적이 아닐까.       


동생이 조카 해동, 현동을 데리고 집으로 온다. 경쾌한 걸음걸이, 숨소리와 함께 조카 두 놈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애들은 자기들끼리 다른 방에서 블록 쌓기 놀이를 하고, 동생과 나는 텔레비전에서 투수 류현진의 야구 경기를 본다. 애들과 따로 다른 공간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니 애들이 많이 컸다. 조금 더 크면 각자의 공간에만 있으려 해 다시 공동의 공간을 만들기 어렵게 될 것이다. 애들이 자장면 먹고 싶다 해서 근처 중국집으로 간다. 작은 조개만 한 입으로 면을 쪽쪽 빨아 당긴다. 얼굴에 묻은 짜장에는 괘념치 않는 게 유쾌한 연극을 한편 보는 것 같다. 삼촌이 실직해도 조카들 먹일 짜장면 값은 낼 수 있다. 한때는 큰 행사 때나 먹었다던 짜장면이 이렇게까지 서민적으로 변했다.       


식사를 마치고 동생과 함께 졸업한 모교 중학교에 가본다. 해동이가 덜컥 달리기를 시작하더니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온다. 손바닥만 하던 녀석이 운동장 한 바퀴를 달릴 정도로 많이 컸다. 동생은 20년 전에 나와 다니던 중학교에서 자기 자식들과 있으니 감격스러워 가슴이 울렁거린단다.      


중학교 때 NBA 마이클 조던, MBC 드라마 마지막 승부로 농구 광풍이 불어 수업 마치고 10분 쉬는 시간마다 농구를 했다. 하늘을 향해 포물선을 그리던 농구장은 지금 선생님들 차량 주차장으로 변해있다. 동생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요즘 애들은 농구 안 하나, 애들 농구장보다 선생님 주차장이 더 중요한가 하며 당시 우리에게 종교 같았던 농구장이 없어진 것에 충격을 받았다. 변하지 않는 게 있나. 농구뿐만 아니라 훌륭한 농구선수이면서 한 가족의 가장이었다는 마이클 조던도 지금은 은퇴한 이혼남이다. 당시 조던의 호적수 터프가이 찰스 바클리는 지금 개그맨 같은 캐릭터로 미국 스포츠 방송, 토크쇼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때는 상상도 못 한 일이 지금을 구성하고 있다. 내 실직도 상상하지도 못한 건데 지금 내 앞에 펼쳐져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운동장 테니스 코트에서도 아버지와 함께 테니스를 친 기억이 있다. 지금은 코트를 모욕하는 저질 수준의 동호회 사람들이 테니스를 치고 있다. 저질 수준 이라도 죽지 않고 살아서 공을 쳐 넘기고 있는 게 부럽다. 니콜 키드먼 주연 영화 <레빗 홀>에서 어린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젊은 엄마(니콜 키드먼 분)는 자신의 엄마와 함께 아들의 짐을 하나씩 지하실로 옮긴다. 지하실에 죽은 아들의 짐을 다 옮겨놓고, 쌓여있는 자식의 물건을 보면서 젊은 엄마는 자기 엄마에게 “이러면 잊혀질까요?” 말한다. 젊은 엄마의 엄마는 “아니, 잊혀지지 않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견딜 수는 있게 돼”라고 딸의 질문에 대답한다. 시간이 흐르면 무뎌진다고, 무뎌진다는 건 사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기보다는 중립적으로 볼 수 있을까. 고향 동네에서 아버지와 함께 쌓은 기억이 많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초기에는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그의 흔적 하나하나가 가슴을 쳤는데, 두해 정도 지나니 그의 흔적들이 중립적으로 변하더라. 나는 지금 서울에서 살지만, 어머닌 이 동네에서 그의 모든 흔적들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거다. 정신병 나지 않을까, 아니면 무뎌져 갈 수, 중립적으로 변할 수 있는 걸 알고 참아 내는 걸까.      


목욕을 갈까, 이발소 가서 면도를 받을까 고민한다. 돈도 못 벌면서 돈 쓸 궁리만 하나 싶어 집에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목욕하련다. 뜨끈한 물에 몸을 담군다. 지난번에 읽던 빌 게이츠 초기 저작 <생각의 속도>를 계속 읽는다. 내용 중 사실에 입각한 경영, 일례로 글로벌 경영에서 여러나라의 세법과 재무제표 기준 차이로 발생하는 표준화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게 인상적이다. 책은 1999년에 쓴 것인데 경영 원칙, 전략 차원에서 지금도 의미 있고, 적용할 게 있다. 그러고 보면 지난 안철수 책도 그렇고, 성공한 사람의 초기 저작이 훨씬 재밌는 것 같다. 욕조에서 책을 보고, 주방에서 주방에서 저녁을 지으며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스페인 노래가 들리고, 지금 실직 상태라는 걸 제외한다면 이 순간이 굉장히 행복하다. 행복이란 뭘까. 실직한 상태라면 아무런 기쁨을 느낄 수 없나, 느끼면 안 되나. 실직이라는 것으로 진로, 신앙, 우정, 가족, 인생을 다시 점검 조명 사색 해보는데, 장기적으로 보면 지금 잠시 이 시간으로 얻는 가치가 훨씬 유익한 것, 그렇다면 기쁜 일 아닐까. 만약 다시 취업한다면 가장 기쁠텐데, 기쁨이란 건 조건에 따른 반대급부 같은 것이기만 할까. 기쁨이란 기뻐할 일이 생기면 기쁜건가, 기뻐하려하면 모든 일에 기쁠 수 있는 걸까. 오늘 아침 식사 때 어머니가 “오늘 하루도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해 주세요”하시던 기도가 생각난다. 어머니의 신앙 차원에서 기쁨이 란건 하나님이 기뻐할 일을 하는 것에서 비롯한다. 그러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은 무엇인가. 만약 그렇다 해서 그런 일을 해도 만약 나는 기쁘지 않으면 어떡하나.       


어머니와 나, 둘이서 저녁을 먹으며 다음 주 목요일이나 금요일에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올라가서 구직해보다가 별일 없으면 다시 내려와 좀 있겠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손님’ 보내듯 그렇게 하라며 자연스럽게 반응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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