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창우 May 09. 2019

사색56. down,  down, drawn

4월 17일(목)

아, 왜 이럴까, 왜 이렇게 처지지. 무저갱에 빠져드는 듯 알 수 없는 무기력. 아니 알 수 있지, 놀고 있으니까 처지지. 한창 일할 때, 남들 한창 바쁠 때 놀고 있다, 놀면 되는데, 남들은 일하고 있다는 게 비교가 되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남들은 돈 벌고 있는데, 난 벌어 놓은 돈 쓰고 있으니까. 흥청망청 쓰는 것도 아닌데, 돈을 벌고 있지 못한다는 처지를 인식하면서부터 밀려오는 무력감.     


어젯밤에는 진도에 세월호 아이들, 거기 단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는 구원과 내 구직을 바꾼다면, 내 구직의 은혜를 그리로 증여하고 싶다는 놀라운 기도를 했다. 어젯밤엔 그랬는데, 오늘 아침엔 당장 내 취직이 우선하다며 기도를 바꿀 것 같다. 그들은 사고로 죽어가고, 나는 실직으로 죽어간다, 내가 살아야겠다. 아... 얼마나 이기적인가,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침울한 기분, 밥은커녕, 밥알 하나도 안 넘어갈 듯하다. 어머니는 고집스레 아침밥 한 공기를 먹이려 한다. 밥에 대한 절대적인 섭취, 끼니때 밥은 꼭 먹어야 해 신념은 어른들, 당신의 인생을 지독하게 헌신하도록, 우리 세대가 밥은 건너뛰어도 돼 하도록 했다. “밥 한 공기 먹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라는 투정은 어찌 보면 그 세대의 헌신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주린 배를, 밥 때문에 처절하게 살아왔는데, 이젠 당연하게 먹을 수 있는 그냥 밥이 되어, 밥에 당연한 태도가 여간 못마땅하실 게다. 결국, 우리 아버지 어머니 세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아침밥 한 그릇을 남김없이 다 먹는다.       

실직자 아들에게 밥을 먹인 어머니는 일하러 나가고, 나는 다시 소파에 햇살을 맞으며 몸을 누인다. 감기 기운이 여전해 침대 이불로 옮겨 눕는다. 저 진도 물속의 헤비 한 수압을 견디고 있는 아이들보다, 실직자, 취업준비생 일상의 무게가 더 무겁나. 얼마나 남을 위해 산다고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가십거리 이상, 남을 위해 실천을 기대할 수 있을까. 네 이웃을 위해서 나는 과연 얼마나 어디까지 어느 정도로 내 몸과 같이 헌신할 수 있나.      

어머니께서 식빵 토스트를 해주신다. 어릴 때 즐겨먹던 간식이다. 계란에 적셔 팬에 구워 설탕을 뿌려, 우유랑 함께 먹는다. 저기압에 빠진 내 기분을 풀어주고 싶은 어머니는 당신이 뭐라도 할 수 있는 걸 찾아낸다. 내일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말한다. 당장 별일도 없는데 아들을 타지로 올려 보내는 어머니 마음은 좋지 않을 거다. 나 역시 별일도 없는데 올라가 뭘 하겠나 싶지만, 일단 올라가야겠다.      


“이제 그만하고 그냥 부산에서 살면 안 되나?”

어머니는 어렵게, 어렵게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 공손하게 눈치를 보며 속말을 꺼낸다. 요지는 말도 안 되게 덜컥 짤리는 리스크를 가진 직업을 계속하겠느냐는 것이다. 지금은 별달리 다른 할 게 없고, 몇 개월 더 구직해보고 안되면 고향 내려와서 국수장사라도 같이 합시다 했더니. 공부 다 시켜놨더니 고향 내려와서 국수 장사하게 하면 아버지가 무덤에서 일어나 자기를 혼낼 것 이라며 화를 낸다. 난 진심인데, 국수장사가 어때서, 오히려 화내는 어머니가 직업에 귀천이 있구나 한다. 이렇게 시작된 화는 그 사장 때문에, 그 미친놈 때문에, 그놈만 아니면 어머니랑 얼굴 붉힐 일도 없을 텐데, 그 새끼 욕을 하기 시작한다. 한참 욕하다가, 한편 내가 그 조직에 없으면 절대 안 되는 사람이었다면 짜를 수 있었을까 하며 자업자득, 내 탓이오 로 승화한다. 아니, 다시 생각해도 그 미친 사장 놈 때문이다. 일단 지금은 그 직종 말고 다른 걸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정말 안 될 것 같으면 부산 내려오겠다고, 근데 여기 와서 또 몰 어떻게 시작할지는 모르겠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린다.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물 차오르는 선박 객실에 어머니와 나, 단 둘만 갇혀 있는 기분이다.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으로 채용 시장에 들어간다. 또, 몇몇 자리가 떴다. 꽤 마음에 드는 곳에 한 자리가 났다. 아, 여긴가, 여기서 일하게 되려고, 신은 나를 이곳에 보내려고, 평론가 진중권이 지독하게 싫어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서사 법이 떠오른다. 최근 분명하게 느낀 건데, 취업에 신앙을 결부시키면, 내가 원하는 생각과 신이 나로 이루려고 하는 신적 계획이 다르다. 다시 말해, 될 것 같은데 되지 않는다. 그렇다 다르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 다른 게 무엇인지, 어떻게 차이 나는지 알기 어렵다. 그걸 알아내는 데 어떤 방법이 있는지 몰라도, 시간은 필요하다. 오랜 시간, 잘 인내해야 신의 계획이라는 것의 단서를 잡을 수 있는데, 지금 내가 깨달은 단서의 수준은, 인내라는 게 하루, 오늘, 이 하루를 잘 보내는 정도인 것 같다. 사실 이 하루가 마냥 반복해서 그렇지, 이 하루란 게 오늘 밤 자면 내일 또 일어날 것 같지만, 오늘 돌아가신 분에게는 내일 하루가 얼마나 귀한 것이며, 또 인류 단위로 보면 모두에게 하루를 돈으로만 계산해도 일당 10만 원씩 60억 인류라면 얼마나 큰 의미인가. 우리에게 없어질 이 하루를, 하루의 연속을 신의 아들 예수가 대신 죽어 죗값을 치러, 우리에게 다시 하루가 주어지고 반복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 하루가 참 귀한 것인데 실직 상태에선 하루를 우울한 기분으로 때워버릴, 죽여 버릴 가능성이 높다. 다시 살린 하루를 죽여 버리는, 시간 죽이기, 이게 돈으로 따져도 너무 아깝고, 신앙 기준에 따져도 비신앙적인 행태이지만, 사실 그날 기분에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 게 달려 있다.   

    

영영 헤어지는 것도, 멀리 외국을 가는 것도 아니지만 어머니와 이별은 마음이 무겁다. 내 할 일을 찾고 싶은 마음이 이별로 인한 무거운 마음보다 더 무겁지만, 어머니를 부산 집에 홀로 두는 건 되도록 피하고 싶은 일이다. 영화 <머니볼>에서 한해 페넌트레이스(pennant race)에서 높은 승률로 시즌을 마무리하는 것보다, 챔피언전 진출해 마지막 한 게임을 지면 한해 야구 농사가 깡그리 끝난단다. 시즌을 잘 운영한 것보다, 챔피언전에서 패한 게 더 큰일이라는 것, 지난 시간 동안 어머니랑 즐겁게 잘 지냈지만 헤어짐 자체는 그동안 즐거움을 깡그리 말아먹는 것 같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서 어머니가 차려주는 아침을 맛있게 먹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색55. 기억을 못 하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