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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May 20. 2019

사색57. 확신의 문제

4월 18일(금)

어젯밤, 구약성경 욥기를 마저 읽었다. 자식 죽고, 사업 망하고, 병에 걸린 욥 정도는 아니지만 내 상황과 처지를 가지고 응석 부리기보다 신앙심으로 견디려는 대응으로 조정해야겠다. 우울한 기분, 비관으로 하루를 포기하려는 자세는 비신앙적이다. 그렇다면 신앙적인 것은 무엇일까? 확신, 믿음으로 실직 상황을 불안해하지 않는 것이라는 감은 잡히는데 실천하긴 어렵다. 한편, 신이 나에게 직장을 주고 안 주고 하는 수준일까? 신이 피조물과의 관계를 직장 주고 안 주고 차원으로 형성하는 걸까. 신은 주고받기에 목적과 역할을 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실직인 신앙적인 일인가? 현대 신앙인의 사사로운 일, 한편 생업으로 인한 생사가 달린 일에 신은 어떻게 간섭할까. 이해하기 어렵다.      


어머니는 오늘 서울로 올라가는 아들을 위해 아침부터 떡갈비를 해준다. 어머니가 식사 기도를 한다. 어머니는 당신과 내 평생 처음으로 내 머리 손을 올리고, 부활의 예수를 믿는 신앙으로 다시 기회를 얻도록 기도한다. 아버지가 그동안 해 오신 가장으로서의 대표기도를 이제 어머니 본인의 업으로 삼는 큰 결심을 이행하신다.      

지난 6일 아버지 추도식을 가졌지만, 음력으로 정확한 기일을 따지면 부활주일 다음날이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날이다. 올해로 말하면 이번 주가 아버지 생에 마지막 주였다. 어머니는 이 기간을 다시 겪는 게 힘들었는데 내가 곁에 있어줘서 덜 힘들게 보냈다고 감사하단다.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께 인사하며 나선다. 한양으로 과거 시험 치러 떠나는, 불투명한 미래를 마주하는 조선시대 과거 준비하는 총각과 다를 바 없다. 고향집에 2주 정도 있었나. 편히 쉬다 간다.      


상행은 처음으로 고속버스를 타고 가본다. 총연장 시간은 고속철도보다 1시간 정도 많이 걸리지만 좌석이 편안하고, 서울역보다 터미널과 서울 집이 더 가까운 듯하다. 창밖으로 겨울과 다른 봄날 햇살이 얼굴을 때린다. 얼굴이 화끈화끈하다. 내려올 때 피었던 고속도로 길가의 벚꽃은 이제 푸르게 변해있다. 버스 안 스카이라이프 이동 텔레비전에서는 올라가는 길 내내 세월호 침몰 현장을 생중계하고 있다. 그들은 깊은 바다 배안에, 나는 실직이라는 망중 해 속에.     


호,

정부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데 할 수 있는 척하는 일이 있다. 큰 사고에 대응하는 정부를 보면 정부의 역량, 정부가 할 수 없는 일을 알 수 있다. 2010년에 칠레 산호세 광산에서 구리를 채굴하던 33명의 광부가 지하에 매몰돼 70일 만에 구조된 일이 있다. 당시 세바스티안 피녜라(Sebastian Pinera) 칠레 대통령은 구조 작업 전 과정을 지휘하며 매몰된 광부 전원을 구조해내 정부 지지율이 급등했다. 경제는 못 살려도, 대부분 살릴 수 있는 척하지만, 인재로 인한 재난에 빠진 국민은 살린다는 것, 재난에 대응하는 데서 국민은 정부의 필요성, 신뢰를 느낀다. 애플, 구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가 저 세월호를 구하겠나. 사태 발생 후 무능력한 대응을 보면 우리 정부의 수준을 실감할 수 있다. 이건 대통령의 역량이 문제가 아니다. 정부의 실력이다. 들켜버린 실력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버락 오바마가, 아니 지하의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도, 현재 우리 정부를 가지고는 이런 무능함을 반복할 것이다. 심지어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일어나도 대응 수준은 지금과 비슷할 것이라 예측한다. 해군정 a대 × 민간어선 b대 × 잠수부 c명 × 헬기 d대 × 통제부(상수) = 재난 구조율?% 라는 공식을 도출해보면, 통제부가 공식의 핵심이나, 통제부가 ‘0’에 가깝다. 수많은 해군정, 민간어선, 잠수부, 헬기를 투입해도 통제부가 0에 가깝다면 높은 구조율을 기대할 수 없다. 이제사 교육부에선 수학여행 폐지를 검토하고 있단다. 이게 우리 정부 대응 수준이다. 문제 발생 후 전체적인 중지 집행, 이 역시 무능력한 정부의 통제 수준이다.      


헬렌 미렌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 분한 영국 영화 <더 퀸>에서는 한때 여왕이 국민을 먹여주고 살려주고 했지만 현대의 여왕은 영국 국민아 아이구 잘한다 잘한다 하며 격려하고 키워주는 막내딸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그런 존재가 아닐까. 뭐라고 할 수 없는, 그냥 잘한다 아이고 고생 많다 나라를 위해 대를 이어 헌신하는구나 하고 잘한다 잘한다 해주면서 국민이 이끌어 줘야 할, 연민해야 할 대통령이다. 그런데 이런 무능을 겪은 국민은 박 대통령에게 그렇게 참을, 딸같이 키울 자신이 있나? 헌법에 보장된 임기까지 국민은 참을 수 있을까. 앞선 세대 어른들이 니들이 일제, 전쟁, 가난, 독재를 경험해봤어 한다면, 우리는 무능을 경험해봤다고. 빨갱이 하면 몸서리치며 반공, 주적 하는 어른들처럼, 무능한 정부 하면 세월호 아이들의 억울한 죽음이 인에 박혀 몸서리치지 않을까. 무능의 시대를 살아가.      


이론적으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는 방법이 있고, 현장에서는 놀랍게도 할 수 없는 일이 훨씬 많다. 그런데 정부는 할 수 없는 일을 잘하는 척한다. 이게 할 수 없는 것보다 더 큰 문제다. 특히 이런 사고 후 대응에서 비효율, 무능을 확인한 뒤, 문제의 근본적 해결보다는 책임자 처벌, 일제 점검 등 차원에만 열심을 쏟는다. 그런 일은 잘한다. 그게 전부다. 그러다가 선거 때는 제가 안전 지켜내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안전 제가 지킵니다 하는 소리로 혼란스럽게 한다. 다만 유권자들이 그런 안전을 장담하는 소리가 얼마나 무효한 소리인지 절감해야 한다. 한두 달 지나면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을 얼마나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언론부터 욕구를 자극하는 정보와 이미지로 하룻밤 사이에 급변하는 현대인의 정서에 맞추기 급급하고, 정부는 관료적 업무 처리 및 절차에 얽매인 전통적인 모습을 보인다. 배를 몰고 사고 현장에 가봤다는 걸 정치 활동 홍보꺼리로 전락시킨 지역구 국회의원이 있다 하고, 세월호 이야기를 SNS에 시로 썼다는 교만하고 오만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정치인이 사고에 대해서 저렇게 설쳐대는 자신감, 교만함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궁금하다.    

 

공영방송에서 세월호 현장 보도 생방송 중 실종자 친척이 방송 중인 리포터에게 욕하는 장면이 그대로 나오더라. 피해자가 언론을 통해 정부를 욕해야 하는, 언론이 현장에서 피해자로부터 욕을 먹고 있다. 현장에서 기자가 취재한 것과 그것을 중재하는 데스크와의 괴리감. 세월호 현장에서 취재 기자들의 심정, 생업인 기자직을 걸고 말할 수 있는 것과 언론이 해야 할 일을 믿는 것 사이의 괴리. 그 괴리감이 방송을 보는 시청자의 불신이라는 명백한 반응으로 나타나고 있는 걸 기자들은 견딜 수 있겠나. 보수 일간지 신입 기자들이 취재한 것을 제출하니, 데스크가 취재해온 팩트를 사용해서 취재 방향과 달리 논조를 바꿔 신문에 나온 경험, 이런 일을 자주 겪어 신입기자가 자꾸 그만두니까, 선임은 그만두지 말고 너네들이 버텨서 신문사를 바꾸는 게 더 현실적이라고 타일렀단다. 그만두는 것 , 붙어있는 것 둘 다 정확한 방법은 아니지만, 참고 붙어있는 게 더 현실적으로 변화 가능성을 높이는 거란다. 이번 세월호 취재 현장에서 정서적으로 민감한 기자들, 꽤 많이 그만두겠지 싶다.      


나라가 온통 안전 문제로 출렁거리니 서울행 버스에서도 이상한 잡음이 나는 것 같다. 왼쪽 제일 앞자리, 운전석 바로 뒤에 앉은 나는 오른쪽 타이어 쪽 이상한 낌새가 느껴진다. 기사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운전하고 있다. 더덕 더덕 더덕 같은 잡음이 계속 반복한다. 기사에게 아무 말도 못 한다. 가만있으라고 해서 가만있었다는데..., 문제가 느껴져도 기사에게 말을 못 하는 권위에 눌린 듯한 행태는 여전하다. 더덕 거리는 소리를 느낀 시간과 반복하는 잡음의 소리를 기록해본다. 기록하다가 잠들었다. 눈 떠보니 차는 반포 고속터미널에 다와 있다. 별문제가 없었나 보다, 가만있으라 하는 이유도 있겠지 싶다. 고속철도보다 편하게 온 것 같다. 그런데 서울 부산을 자주 왔다 갔다 하니 막상 여기가 서울인지 부산인지 공간의 차이를 느낄 수 없다. 공간 차이에 대한 긴장감이 사라지니 공간에 대한 차별도 없어진다. 마냥 다 서울도 또 다른 고향 같이 편안하다. 물론, 어머니가 밥 차려주는 것과 혼자 해 먹는 차이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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