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창우 May 20. 2019

사색58. 대표기도 준비

4월 19일(토)

서울 집에서 아침, 

아침밥 먹었나 라고 어머니의 메시지가 온다. 실직자 아들에 대한 당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추슬러 ‘식사했냐’는 일상의 안부로 승화시킨다.  


예전 월급날이 20일, 실직 중이지만 예전 하던 데로, 액수를 좀 줄여서 어머니께 용돈을 보내다. 자식이 보내는 돈, 사실 아버지 어머니께서 키워 준 투자에 대한 일종의 채무를 갚는 건데, 실직 중이라 투자 대비 수익률이 저조해진 거다. 자식 투자만큼 알 수 없는 투자가 어디 있나. 실패할 줄 알면서도 투자하는 게 부모의 자식 투자일 텐데, 한 30% 줄여서 보내며 메시지를 “어머니 수익률이 떨어졌다”며 “곧 회복하도록 얼른 취직하겠다”라고 보낸다. 실직해 적은 돈 보내는 아들도, 실직자 아들에게 용돈 받는 어머니 심정도 좋을 리 없다.      


저축해놓은 게 꽤 있지만 수입 없이 지출만 발생하니 자산 상황을 점검하려 각 은행 계좌의 잔액을 다 뒤져본다. 그런데 월급 통장에 예상하지 못한 돈이 좀 들어와 있다. 웬일인가 하니 실직 직전까지 며칠간 일당이 들어온 것이다. 생각지 않았는데 꽤 묵직한 돈을 보니 묘하게 사장한테 감사하다. 월급, 매월 당연한 듯이 따박따박 때 맞춰 돈 들어 오가는 게 사업주는 얼마나 큰일이고, 피고용인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스럽다.      


자산 상황을 살펴 유동성을 가진 돈이 2000만 원 정도 있다. 한 달에 150만 원 정도 쓰면 1년 넘게 수입 없이 지낼 수 있겠다. 소비는 이성적인 계획보다 돈 쓰던 습관에 결정된다고, 월급쟁이 때 지출 습관이 수입이 없어졌다고 쓰던 돈을 줄일 수 있을지.      


한승태의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밑바닥 일, 아르바이트, 생활을 그랜드슬램처럼 하나씩 다 해본 경험을 신랄하게 기록했다. 주유소 총잡이, 편의점 알바, 고시원 생활, 꽃게잡이 같은 상황 속에서 ‘인간’을, 존재를 잘 그렸다. 웃지 못할 열악함 속에서도 저자는 희극적으로, 헛웃음일지도, 그 속에서 인간성에 대한 고민을 열거한다. 과연 인간성이 무엇인지, 돈 벌기 위한 밑바닥 세상에 웃음이 나올 뿐이다. 지금까지 편의점 직원, 주유소 직원에게 기계적으로 대했지, 인간이라고 고려하지 않았다. 화폐 거래, 서류 차원으로 대한 것 같다. 비 오는 날 퀵서비스, 배달음식 시키면서 이 일을 하는 인간성 한번 고민한 적 있나. 다 인간들인데, 돈 버는 상황에선 돈이 인간성을 압도하기 때문에 그 가치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번 돈으로 사람답게 살면 되지 하겠지만, 과연 그 돈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 책에서 나오는 영세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읽으면서 그들을 3자로 거리를 유지하려 하는 나를 발견한다. 이들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나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다 문득 나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지 않을까. 계속 놀다가 결국 뭐라도 해야 할 상황이 오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소스라치게 책을 덮는다.  나는 절대 그들 같이 되면 안 돼야지 하는 차원,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못하는 경제적 노동 단위로 보는 게 익숙하듯, 나 역시 책 속일 일이라고 한정하려는 현실 부정으로, 이 책은 두 번은 읽지 못할 논픽션 공포 소설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내가 그들과 같이 영세한 수준의 일을 하게 될 가능성은 높아도, 그렇게 치열하지만 가난하고, 과소평가된 일을 하는 직종에 종사하도록 처한 사람들이 일반적인 소득 수준으로 회복?하는 건 훨씬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 그게 더 무서운 일인데.     


교회 친구 강기현 전화가 울린다. 내일 부활절 주일예배 대표기도를 대신 좀 해달란다. 급하게 토요일 밤, 이제사 대타를 찾는데 제일 든든한 게, 만만하겠지, 나라서 연락한단다. 우리나라 앞바다에 200여 명이 사망 사고난 일이 있고 첫 주일예배, 그것도 부활절, 그 대표기도를 나에게 맡긴다. 얼마나 무겁나. 대형사고를 대하는 신앙인의 태도를 대표해서 내가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실직자 주제에 지금 내 사정도 복잡한데 성도를 대표해서 기도할 역량이, 마음이 있나. 저 진도 바닷속 아이들의 부활은 구출이고, 실직자인 나의 부활은 재취업인가. 툴툴거리며 기도문을 쓴다. 부활을 믿는가, 예수라는 신의 아들 부활은 믿어도, 내 인생에서 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나. 부활은 무엇인가. 죽어서 천국이라는 막연히 행복하기만 한 세계로 가는 게 부활인가. 오늘 실직자인 내 실직 기간의 하루를 잘 이겨내는 승리가 인생의 작은 부활인가. 신앙인들이 신앙으로 일주일의 6일을 살다가 죽어가는, 그리고 다시 살아나야 하는 일요일의 주일예배의 가치를 이번 부활절을 맞아 강조해야 하나. 무엇보다 세월호 사건을 언급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신앙인이 이 사건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나,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나, 차라리 모르는 척 기도하지 말까 고민이다. 만약, 세월호 사건을 놓고 기도한다면 


"하나님, 세월호에 대해 여러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생각이 이렇다 저렇다 떠들지 않게, 교만하게 말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정도, 신앙의 이름으로 비극을 함부로 신격화하지 않았으면 한다. 혹, 담대하게 "교만해서 발생하게 된 인사(人事), 이 일을 두고 우리 모두 진심으로 회개하기를, 저 가족들과 함께 아파하기를 원합니다"라고 준비하지만 이걸 읽을 용기가 없다. 사실 우리가 같이 아파한다는 게 타인의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동정적인, 교양적인, 인간의 도리라 하는 연민으로 우리의 불편한 마음을 없애려는 이기적인 태도가 크다. 진심으로 그들의 슬픔과 함께 할 각오가 없으면, 위로도 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고민이다. 내일 아침에는 세월호에 대한 기도를 할까, 말까 결정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색57. 확신의 문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