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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May 30. 2019

사색62. 기분 신앙

4월 23일(수)

“근거 없는 낙관주의와 모험주의가 결합해 잠재적 위험의 폭발성을 가중시키고, 여기에 자기 예외주의가 더해져... ”

오늘자 조선일보에서 어떤 대학의 어떤 교수가 세월호 사태 발생 원인에 대해 한 말이다. 대량 인명 손실 사고에 대한 진단이지만 ‘근거 없는 낙관주의’, ‘자기 예외주의’란 말은 실직 중이면서 경력에 제한해 한 업종에만 계속해서 구직하는 내 태도를 두고 하는 말 같기도 하다. 가라앉은 배만큼 내 마음이 뜨끔하다. 내 경력에 해당하는 직종에서 일자리를 계속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결국 채용될 것이라는 생각이 옳은 것일까. 나만이라도 나에 대해서 조금은 낙관해야 하지 않을까. 남들 보기에 가능성 없어 보여도 나라도 나에 대해 긍정해서, 남들은 다 실패하더라도(구직, 창업, 연애, 뭐든 간에) 나만은 실패하지 않을 거야 하는 예외를 두는 게, 아무도 날 위하지 않는데 나만이라도 나는 문제없어하며 응원해야 하지 않나.  

    

예전에 석사 과정 중 조사연구방법을 배우는 데, 수업을 진행하는 교수님께서 자신이 하는 연구의 타당성을 최대한 필요하게,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다, 중요한 연구라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고, 오버하라고 하더라. 남들은 당신 연구에 관심이 없다. 그러니 자신이라도 자기 연구에 대해서 최고라는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고, 그래야 남들이 조금이라도 본다며. 사실 남들도 안 보고, 심지어 지도교수도 잘 보지 않으니, 어떤 걸 써도 상관없다고, 연구의 타당성은 자신만이 극찬할 수 있다 하더라.      


데이비드 헬버스탬의 <최고의 인재들>을 읽는다. 책에서는 미국 케네디 행정부가 당시 베트남전에 개입하는, 전쟁이라는 정책 선택이 잘못된 여러 징후를 소개한다. 저자가 당시 전쟁에 개입하는 미국의 선택이 실패라고 진단한 증후를 세월호 참사에 대응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에 대입해 생각을 4가지만 말하면     


“정부로서는 정책 실패(정부 실패)에 대한 부담을 민간과 의회에 넘기고 싶다. 책임에 대한 분배는 있으나, 정책 운영의 재량에 대한 분배는 없다. 어떻게든 청와대에 힘이 집중한다면 정부의 각 부처 최고 수장부터 소관 재량을 운영할 역량이나 있는지는 비관적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사건을 대응하며 부패한 관료에게 호통 치는 만큼, 딱 그만큼만 관료 사회의 부패를 개혁하려, 설득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나, 박근혜 대통령의 장관급 인사를 보면 여전히 관료에 대한 높은 신임이 있어 보인다. 역설적이다.”


“응급 처치에서 CPR을 개시한다면, 환자를 살려놓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환자의, 생명의 희망이 목적이 아니라, 기왕 응급조치를 하자고 선택한 의료진 입장에서는 조치에 실패했다는 책임을 지기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환자가 죽든 말든, 책임은 환자의 목숨이 아니라 응급조치를 실시했다는 선택에 있다.”


“확실한 건, 규제 대상의 실체는 분명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규제자 특히 강력한 권한을 가진 자의 마음, 생각, 의지가 규제의 실체이다. 그런데 규제를 기획하는 사람의 규제는 실제가 아닌 환상이다. 규제자는 모두 환상 속에 있다. 자신의 기획, 통제가 가능할 것이라고. 세월호 문제에 따른 규제 개선, 그것 역시 또 다른 규제, 환상 속의 규제이다. 환상 속의 그대”      


신문 읽고, 밥 먹고, 이력서 및 지원서 써내고, 미뤄뒀던 책을 읽으며 일상을 유지한다. 문득 실직 상태라는 데서 비롯한 우울한 기분이 들면, 일상 전체가 우울함에 지배당한다. 졸업한 지 한참 지난 34살에 다시 대학 도서관에 와서 책이나 보고 있는 게, 지금은 열심히 직장에서 일하는 게 내가 계획한 인생 설계에 해당하는 시점인데, 여기서 이러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실패한 것인가? 몸은 도서관에 앉아 있지만 마음은 무저갱으로 빨려 들어간다. 우울하다.      


MBC 라디오에서 일하는 친구 동미란, 미란이가 생각난다. 중, 고등학교 때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살던 고향 친구인데, 라디오 피디 하겠다고 몇 년 동안 준비하다 포기하고 부산 고향집으로 내려갔었단다. 대학부터 살았던 서울살이 살림을 용달차에 실어 보내며, 따로 가면 될 걸 차비 아끼겠다며 용달차에 함께 타고 내려갔단다. 앞좌석에 용달 아저씨와 비좁게 함께 앉아 불편한 공기를 들이키며 네 시간 넘게 내려갔다기에, 짐 보내고 편하게 따로 가지 그런 궁상을 부렸냐며 타박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부산에 거의 도착하는데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앞에 두고 용달차가 고장 나 한바탕 난리를 치렀단다.      


고향으로 내려가 일주일이 흘러, 아버지와 함께 한 밥상에서 “이제 고향에서 조용히 공부방이나 하며 살지”라는 타박에 미란은 아버지가 딸에게 격려는 못할망정 그게 할 소리냐며 밥상을 엎어버리려다가 겨우 참고 목구멍의 밥을 삼켰단다. 내 라디오 피디 해내고 말리라 삭이고 삭인 분을 열정으로 승화시켜 결국 지상파 방송사 라디오 피디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라디오 피디가 된 미란이는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배치받아 조연출 하다가, 손석희가 13년 동안 잘 진행하던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고 JTBC 사장으로 훌쩍 떠나버려, 손석희도 없는 ‘시선집중’을 끌었다.      


지상파 방송국 라디오 피디라는 거창한 명함이 그녀의 이야기를 빛내는 것보다 여러 부침을 견디며 진로에 대한 고집을 유지한 게 대견스럽다. 그렇게 미란이는 진로를 고집했으나, 나는 수정해야 하나. 고민이다. 나에게 미란이만큼 진로에 대한 확신, 열정이 있나. 꼭 이걸 하고 싶은 마음이 있나. 삭일만한 분노나 있나 모르겠다.      


분,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기분이 좋다, 기분이 나쁘다, 지금 다운됐다 하는 등 신앙 상태를 마치 기분 타령하는 것처럼 말한다. 기분 상태에 따라 영향받는 신앙이란 게 신앙이라 할 수 있나. 신에 대한 믿음으로 인생을 유지한다는 건 기분 상태로 그 믿음과 믿음 생활에 영향받을 게 아니지 않나. 그렇게 신앙뿐만 아니라 내 모든 일상의 판단, 행동에 대해 기분에 영향받지 않는다 확신했는데, 실직당한 처지가 되고 보니, 어려운 일을 당하고 보니 기분에 일상이, 신앙이 좌지우지된다. ‘정말 내가 이러다 망하는 건가?’, ‘내가 뭘 그렇게 잘 못했나’, ‘내가 그렇게 잘 못살았나?’, ‘벌 받는 건가?’, ‘나 짜른 사장 집에 불을 지를까?’, ‘타 회사 동 직종 경력직에서 날 쓸까?’, ‘봄, 여름이 지나 올해 가을, 겨울, 올해 모두 백수로 보내야 하나?’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우울한 기분에 휩싸여 만사가 기쁘지 않다. 이런 기분으로는 신앙이 주는 확신과 담대함은 사라진다. 신앙인이라면서 왜 기분의 부침에 하루 종일 종속당해야 하는지, 이걸 다스려야 할 텐데. 거시적인 안목으로 확신을 가져야 하는 데, 여전히 이 기분을 다스릴 자신이 없다.       


내일은 나가서 바람을 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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