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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Jul 03. 2019

사색67. 비관적인 결론을 예상하려는 본능

4월 28일(월)

득,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들린다. 모처럼 내리는 거센 소나기다. 젖어도 될 만한 옷으로 얼른 갈아입고 동네 중학교 운동장으로 뛴다. 내리는 비에 온몸을 적시며, 단비를 기다린 농부 마냥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고 있었다. 아직 쌀쌀한 날씨지만 비 맞으며 축구를 하던 아이들과 함께 흙탕물에서 공을 찬다. 수중전이지만 승부에 비 따위는 문제가 아니라고, 오직 승리만이 모든 것을 말해 줄 테니. 


홀딱 젖어 집으로 돌아가는데 퇴근길 예상하지 못한 소나기에 나만큼이나 홀딱 젖은 사람들이 보인다.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며 생각해보니 미친 짓 같다. 한편으로 답답한 마음에 그러지 않았나 싶다. 비를 흠뻑 맞아봐도 답

하긴 여전하다.     


구약성경을 펼친다. 창세기의 절정, 노예살이 하다가 총리가 된 요셉 이야기를 읽는다. 열두 형제의 막내로 아버지의 편애와 배다른 형들의 시기로 요셉은 어린 나이에 다른 나라의 노예로 팔려간다. 사실일까? 형들은 배다른 동생을 노예로 팔정도로 미웠을까. 그렇게까지 야만적일 필요가 있었을까. 요셉은 노예로 가서도 일 잘해 집주인의 신뢰를 얻는다. 곧, 주인집 가계의 재무를 전담한다. 그렇게 형편이 풀리나 싶은데, 집주인 아내가 요셉을 유혹한다. 잦은 유혹을 피하다가 한 번은 완강히 거절한다. 이에 자존심 상한 아내는 ‘이놈이 날 강간하려 했다’고 요셉에게 누명을 씌운다. 거절당한 여자가 제일 무섭다. 주인집 아내 입장은 자존심 문제지만 노예 요셉에겐 목숨이 걸린 일이다. 결국, 강간미수 및 노예 신문 일탈 등의 죄목으로 감옥으로 간다. 마침 감옥에서 같이 투옥 중인 임금의 포도주를 담당하던 신하와 친분을 쌓는다. 그 신하가 풀려날 때 요셉은 내 억울함도 임금께 좀 알아봐 달라며 감옥을 선처를 부탁한다. 그러나 그 신하는 요셉과의 친분을 잊어버린다. 예나 지금이나 받은 도움은 잊어먹기 십상이다. 

      

요셉의 노예살이, 감옥살이, 결국 기다림이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잘 기다릴 수 있냐는 것이다. 성경 창세기에는 말도 안 되는 억울한 상황에도 요셉에게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기록한다. 요셉 역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라는 것을 인식하고 행동한다. 아주 억울한 상황에서도 하나님, 신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면 그 상황은 억울하지 않을까. 믿음이 충분하다면, 행동, 선택에서 그게 나타날 터, 문제가 지금 당장 해결돼야 한다는 믿음보다 문제 해결의 때까지 온전히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 심지어 억울한 처우를 받고 있더라도. 


구약 성경에선 억울한 일 당하는 인물이 많이 나온다. 아브라함, 다윗, 욥은 그 억울한 일을 당하며 이 문제를 해결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기보단 자기 마음대로 행동해서 실수도 하고, 사고도 좀 치고 한다. 그래서 그 인물에게는 공감이 가는데, 요셉은 다르다.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완벽하다. 집주인의 아내, 욕정에 들끓는 우아한 중년 여성이 나체로 유혹해도 ‘죄’라고 인식하고 거절한다. 모든 일을 신과 나사이의 문제라고 인식한다. 혹시, 옛날에는 야동, 포르노 등 성에 대한 흥미거리가 전혀 없어 요셉이 색욕에 대해 잘 몰라서 그렇게 거절할 수 있었다고, 섹스의 즐거움을 몰라서 거절한 것일까라도 생각해봤는데. 그러나 성경에선 요셉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할 수 없다’라는 신격과 인격의 완전 합체를 보인 선택을 했다고 말한다. 징그럽다. 


창세기의 저자가 요셉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쓴 건 요셉도 해냈는데 너도 나도 할 수 있다고 강조하기 위한 게 아닐까. 내가 보기에는 하나님이 요셉을 도운 것처럼 나도 도울 거 아닌가. 물론 요셉은 나중에 당시 이집트라는 강대국의 총리가 되는데, 기독교인들 중에 억울한 고생 좀 하면 나중에 총리가 되려나 하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좀 있다. 교회 다니는 사업가나 정치인 같은 부류 중 갑자기 사업에서 크게 손실을 보거나 경제 사범으로 몰리거나, 또 선거에서 떨어지거나 주요 인사에서 물 먹으면 요셉의 고난 타령 많이 한다. 


인생에서 예상하지 못한 고난을 마주할 때 하나님은 내 상황에 침묵하시는가에 대한 해답을 가져야 한다. 요셉에 따르면 하나님은 믿음으로 대응하는 신앙인의 상황에 함께 하신다. 다만 신앙인이 그 상황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볼 수 있어야, 대처하는 자세가 달라지겠지. 그래서 예상하지 못한 고난을 보는데 어느 정도 높은 차원의 시각이 필요하다. 실직하고, 다시 구직하고, 이게 아주 인간사 차원의 일 같지만, 신앙 차원에서 보면 인간의 삶에 신이 개입할 여지가 큰, 또 개입해 달라고 요청하는 신과 인간의 가장 큰 접점이 아닐까. 사실 지금 실직 상황에서 높은 차원의 의도를 이해하려는 의지가 크게 있지는 않지만, 마음이 힘들어서, 실직 상황 자체가 주는 무거움은 구약 성경 창세기의 요셉이 고난에 대응하는 신앙적 자세를 갖추게 한다. 

     

점심 먹고, 몇 군데 더 지원할 이력서 작성을 마무리한다. 실직 직후 지금까지 13개의 지원서를 보냈다. 13개 중 인터뷰를 한건 2회, 그것도 실직 초반에 있는 일이고, 이후 인터뷰 연락은 오지 않는다. 이제 포기해야 하나, 면접 기회가 줄어드는 걸 패턴으로 엮을 게 아니라, 앞의 사건과 뒤의 사간이 상관없는 각개의 사건으로 봐야겠다. 로또 번호와 같은 거라고, 지금까지 많이 나온 번호가 이번 주 당첨번호로 또 나올 일은 거의 관계없다고. 결국 계속 지원하다 보면 언젠가는 문이 열리는 건가. 힘든 건 지원서를 작성하는 것보다 기다리는 것, 그리고 좋지 못한(서류 탈락, 인터뷰 연락 오지 않음) 일들을 연속해서 엮어 앞으로 취직할 수 없을 수도 있겠다는 비관적인 결론을 예상하려는 본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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