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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Jun 29. 2019

사색66. 조력자와 개새끼

4월 27일(일)

늘 잠들기 전 하는 다짐, 내일은 꼭 아침 일찍 일어났으면. 다짐은 다짐일 뿐, 오후를 가리키고 있는 익숙한 시곗바늘을 확인하며 눈을 뜬다. 멍하니, 또 늦잠이네, 오전을 날려먹었네 타박하기보다, 어제 등산한 게 피곤했나 변명하고 싶다.      


집 청소를 시작한다. 실직하고 난 뒤 시간을 대부분 집에서, 정확하게 방에서 보내니 집 쓰레기가 훨씬 많아졌다. 일주일에 20리터 쓰레기 봉지 한 장이면 충분했는데, 요즘은 3장을 쓴다. 세탁기를 돌리고 나니 수건이 14개다. 매일 하루 2번 집에서 따박따박 씻으니 일주일치에 들어맞는 숫자이다. 예전에는 회사 지하에 있는 헬스장에서 샤워해서 집 수건 쓸 일이 별로 없었는데 집에 있는 시간과 쓰레기, 빨래 양은 비례한다. 싱글이라 다행이다. 아내가 있었다면 놀고 있는 남편으로부터 늘어나는 빨래와 쓰레기를 보고 얼마나 타박했겠나, 싱글이라 참 다행이다.      


저녁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본다. 트레이너와 선수의 절대적인 신뢰 관계. 자기가 키워낸 선수가 경기 중 사고로 불구가 돼, 죽여 달라는 선택까지 이해할 수 있는 트레이너, 죽음을 도와주는 조력자. 문득 방 안을 둘러보니 나 혼자이다. 나에게 조력자는 어디 있나. 만약 신에게 얼굴이 있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얼굴일까? 짜증 그득한 표정, 가끔 입술에서 볼까지 번지는 미소를 짓는.      

문득 실직 기간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길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지금부터 최대한 짧게 기다린다면 지난주에 지원한 몇몇 회사로부터 면접을 보고 출근하는 데는 2주 정도 걸리겠지. 거지 같은 회사 몇 군데에도 지원했고, 지원할 때는 거지 같다 생각했는데 지금은 거기에서라도 전화 오면 당장 출근하겠다고, 이 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다.      


한창 일할 때 내 목표는 승진이었다. 동기들이 과장, 몇몇은 초고속으로 차장 되는 걸 볼 때, 나랑 같이 짤렸던 선준욱 과장이 만약 없어지면 내가 그 자리로 갈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사장이 이해가지 않는 집단지성운영체계를 도입하고 강요할 때, 난 이 체제가 직원 간에 프리라이더를 발생시킨다, 일을 하는 게 아니고 서로 자기 역량을 다른 직원에게 교육하는 학원으로 전락할 것이다며 어디서 썰풀이 경영서적 하나 읽고, 회사 운영에 도입하려는 문제점을 소견으로 밝혔다. 이에 사장은 프리라이딩해도 된다, 이 실험이 벼랑으로 떨어지면 우리 모두 같이 떨어지며 확신하고 자신의 실험에 동참해 달라고 했다. 그래, 좋아, 사장이 프리라이딩해도 된다는데, 이건 절대 구조적인 문제라고, 개인이 업무에 임해 성취할 의욕을 상실시키는 구조라고, 적극적으로 프리라이딩에 임해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이번에 나는 내 개인의 목표인 박사 지원도 하고, 미뤄놨던 학술지에 논문도 제출해보겠다고 올해 목표를 잡았다. 그런데 이렇게 짤리고 나서 돌아보면, 프리라이딩하겠다는 내 마음은 절대 들키지 않았지만, 자기의 경영 실험이 실패하는 것에 절대 직원 인사 조치 없겠다던 사장의 호언과는 반대로 나는 집에 있다.      


이제사 돌아보면 설마 내가 먹었던 마음이 이기적이라서 그랬나? 남이 사라진 자리에 승진해서 내가 메우고, 회사에서 내 개인의 목표를 설정하고 월급 받고 살아가는 게 실직당한 이제야 혹시나 그게 나빠서 지금 이렇게 됐나 비판하지만, 만약 실직당하지 않았다면 내 일과 회사 일을 잘 섞어서, 대부분 내 이익이 남는 선택을 했겠지만, 지내며 당당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실직이라는 상황이 정말 싫고 짜증 나지만, 한편 내가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한 걸 해봐야 하는 기회인가 싶다. 실직당하지 않았다면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확신하고 이행하던 것들에 대한 회의. 그러나 실직이라는 상황, 그 안에 신적인 선한 의도, 좋은 기회를 찾아보려 해도, 실직 그 자체는 당사자에게 혼란스럽고, 기분을 급변하게 하고, 무소득이라는 것으로 대외 관계에 소극적으로 된다. 나는 지금 실직자인 게 부끄러운가, 억울한가, 화가 나는 가. 세탁을 마친 빨래를 널다가 문득 이 상황을 일으킨 사장이 생각나 개새끼라고 소리치며 빨래 통을 발로 차 버린다. 개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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