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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Jun 29. 2019

사색65. 실직자와 근로자의 차이

4월 26일(토)

모처럼 오전에 일정(등산)이 있어 그랬나, 밤새 잠 한숨 못 잤다. 억지로 잠을 청하는데 그동안 늘 새벽 2, 3시나 되어 잠자리에 들었으니, 저녁 10시에 시작한 잠자리가 이뤄질 리 없다. 매일 밤 잠들기 전, 내일은 뭘 해야 하나 하다 막상 내일 아침에 등산을, ‘오전에 할 일이 있다’는 게 잠 못 이룰 정도로 긴장할 일인가. 내 처지가 안타깝다. 자야 하는데 뒤척거리다가 날이 밝는다. 창밖을 포섭했던 깜깜한 어둠이 차차 밝아지면서 쫑알쫑알 새소리가 들린다. 도시의 미명을 깨우는 첫소리는 도시답지 않은 새소리로 시작한다. 날이 밝고, 오전 8시에 만나자는 약속에 맞춰 관악산 입구로 간다.      

김효현, 그의 친구들과 함께 산을 오른다. 보통 등산객이 알고 있는 관악산 입구에서 등산을 시작하는 코스와 버스를 좀 더 타고 서울대학교 안으로 들어가 공대 건물 앞에 내려, 이젠 거의 공식 구멍이 된 개구멍으로 시작하는 코스(총연장 거리가 1/4 정도 줄어듬)가 있다. 오늘은 관악산 입구에서 딱 시작한다. 연주대 꼭대기까지 등반을 마치고, 딱 기분 좋은 피로감으로 오리고깃집으로 간다. 오리백숙을 시킨다. 효현이 백숙을 찬양하기에 그렇게 백숙으로 주문한다. 효현은 앞으로 매주 토요일마다 등산 갈 거라고, 함께 하자는 제안에 매주 금요일 밤에 생각해서 결정하겠다고 한다. 식사하는 동안 이렇게 시작한 등산 멤버를 클럽으로 결성해 ‘??회’를 만들어야 한단다. 등산도 뭔가 회(會)를 만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이름으로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산오리망고차차딸기쉐이크대주카레”를 유력하게 검토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도 왜 그런 이름이 만들어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주’는 효현 친구 중 한 명 이름이다. 여하튼 작명까지 한 관악산 등반회를 앞으로 몇 번이나 참여할 진 모르겠다.      

식사하러 번화가까지 나왔으니 이발하러 미용실로 간다. 토요일이라 혼잡하다. 선호하는 세라 실장이 대기자가 많다며 1시간 넘게 걸린다고, 꼭 세라 실장에게 하겠다면 1시간 이후에 오란다. 앞으로 1시간 동안, 아니 오늘 하루 동안 심지어 내일, 모레까지 기다릴 수 있지 않나. 1시간 후에 오겠다고 예약을 한다. 털레털레 미용실을 나오며 무얼 할까, 아니 앞으로 무얼 해야 하나 고민스럽다. 고민하면 뭐하나, 할 일 자체가 없는데. 카페에 들어가 구석 으슥한 자리를 찾아 앉는다. 차를 하나 시킬까 하다 오리 백숙 먹은 포만감이 아직 가시지 않고, 실직자가 차 시켜 먹을 처지도 아니고, 또 카운터에서 이 자리가 잘 보이지 않으니 좀 뭉개다가 나가려 마음먹는다. 어젯밤 등산 간다고 긴장해 오지 않던 잠이 이제 오기 시작한다. 꾸벅꾸벅 졸며 카운터 눈치를 보다가, 얼굴 두껍게 하고 계속 졸아버린다. 결국, 사장 같은 분이 와선 ‘학생, 누굴 기다리나?’ 하기에 ‘학생 아닌데요’ 하고 슬그머니 일어난다. 한참을 졸았다 생각하는데 1시간이 되려면 아직 20분이나 남았다. 근처 또 다른 카페 테이블에 앉아서 20분을 마저 때운다.      

돈 없이, 의미 없이 시간을 뻐팅겨 보니 이게 노숙자 행태이지 않나 싶다. 편히 등 붙일 곳 없는데, 시간은 많고, 시간을 때우긴 해야 하는데 특별히 할 건 없고, 노숙자에게 하루라는 시간은 정말 길구나. 나야 미용실 예약, 그리고 월세집이라도 있지만, 노숙자는 기다리는 목적도, 장소도 없이 시간을 채워야 한다. 오래전 봉사활동으로 겨울이 시작되는 10월에 영등포역사에서 밤을 보내는 노숙자들에게 침낭을 나눠주는 일을 했다. 놀라운 건, 몇몇 노숙자는 받은 침낭을 소주로 바꿔서 마시더라. 봉사를 시작한 첫해 겨울에는 소주 바꿔먹는 게 충격이었는데, 다음 해에도 같은 일이 반복하기에 물어봤다. 소주로 바꾼 노숙자 왈, 10월은 아직 추위를 견딜만하니 침낭보다 당장의 소주를 마시겠단다. 또, 어차피 추운데 침낭 하나로 추운 밤을 견디기 어렵다고, 차라리 소주 한 병이 오늘 밤을 행복하게 한단다. 오늘 하루 빈둥거려본 내 생각으론, 노숙자가 없는 돈으로도 소주 사마시는 게, 하루가 무지하게 길어, 지루해서 술로 도망가는 게 아닐까. 주어진 시간이 너무 길어, 그 긴 시간을 줄이고 싶어서, 의식을 둔감하게 만들려 소주를 마시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침낭을 소주로 바꿔 마시는 노숙자는 이해할 수 있는데, 침낭을 소주로 바꿔 주는 가게 주인의 악마적인 행태는 어찌할까. 아니, 봉사 기부를 침낭으로 줄게 아니라 돈으로 줘서 노숙자 알아서 필요한 걸사서 쓰라고 하는 게 더 좋을 지도. 사실 겨울 차가운 돌바닥에서 자는 데 7000원짜리 대량 구매 침낭 하나 주고, 겨울을 견디겠지 생각하는 기부자가 더 파렴치한 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무작정 한 시간 기다리는 것도 지독하게 지루한데, 남은 평생을 뭔지도 모를 뭔가를 기다려야 할 노숙자는 소주 안 마시곤 단 하루, 단 한 시간을 견디겠나.      

한 시간을 때워 미용실에 가서 ‘세라’라는 이국적인 이름의 헤어드레서에게 머릴 맡긴다. 원하는 헤어스타일이란 게 생각보다 소통하기 어렵다. ‘어떤 스타일을 원하세요?’라는 질문에 한창을 설명하고 알겠다고 하는데 막상 이발 후 나온 머리는 내 설명에 가깝지 못할 때가 많다. 이게 설명의 문제인지, 헤어드레서 실력의 문제인지 누구 탓을 하기 모호하다. 차라리 ‘예쁘게 알아서 깎아주세요’하고 전문가에게 맡겨 버리며, 전문가에게 맡겼는데도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문가를 바꾸면 되잖나. 또는 원하는 머리 스타일을 핸드폰에 사진 찍어 놓고 보여주며 이렇게 해달라고 한다. 사진을 보고 전문가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스타일을 고객에게 사실대로 말해주면 된다. 다시 말해, “선생님은 죠지 클루니가 아닙니다”라고. 그렇게 1시간을 기다린 이유가 모처럼 소통이 잘되는 미용사이기 때문이다. 내 평생 남자 짧은 머리를 이발해왔지만, 또 내 머리카락이 굵은 직모라 스타일 나오기 어렵지만, 세라 실장은 내 머리를 해낸다.     

 

전화가 온다. 김성한이다. 학교 도서관에서 만나잔다. 이 녀석 연애를 실패하니 친구를 찾는다. 지금 현재를 기준으로 하면 좋은 직장에서 일하는 성한이가 할 게 없어 토요일 오후에 학교 도서관에서 책 보는 것, 실직자인 나도 할 게 없어서 하루를 도서관에서 책 보는 것. 아무래도 그럴싸한 직장이 있는 전자가 훨씬 낫겠지만, 당장 이 시점, 이 순간의 질적인 것만 고려한다면 차이가 있나 싶다. 차이가 있나?      


성한이를 만났는데, 나는 내일 J회사 지원서에 첨부할 기획서를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집에 가서 1시간이면 마칠 것이니 우리 집에 같이 가자고 기획서 작성을 마무리하는 동안 집에 있는 책이나 보고 기다려달라고 조른다. 마냥 기다리게 하기 뭣해 침대에 누워있으라니, 누우면 잔다고, 자면 일어나질 못한다고, 일어나지 못하면 저녁에 도서관 가지 못 갈 테고, 못 가면 자기가 만든 주말 도서관 계획을 망친단다. 별걸 다 걱정한다고 자빠져 자기나 하라고 침대로 밀친다. 결국 성한이는 자기 예언대로 눕고, 자고, 도서관 계획을 망친다. 그동안 기획서를 마친다. 기획서는 전공 분야가 아니라 완벽하지 않아 만족스럽지 못하다. 채용 기준을 만든 인사담당이 기획서의 완벽성을 기준할지, 공고를 보고 어중이떠중이 다 지원하는 걸 막기 위해 일종의 거름 장치로 기획서를 붙이라는 건지 모르겠다. 여하튼, 그렇게 마친 기획서를 성한에게 보여준다. 대충 훑어보더니 쓰는 성의 있으면 되겠지, 잘 보지도 않고 퉁명스레 말한다. 나는 내 취업이 걸린 일인데 어찌 퉁명스럽냐며 화를 낸다.     

 

어느덧 저녁 식사, 집 앞 중국집에서 탕수육과 짬짜면을 시킨다. '짬짜면', 짬뽕과 짜장면을 분할해서 한 그릇에 콤비네이션으로 팔다니, 짬뽕이냐 짜장면이냐 고민하지 않게, 적절히 둘 다 먹을 수 있게 하는 훌륭한 아이디어이다. 몇 발걸음 안 되는 집 앞 중국집이라 늘 가서 먹다가 오늘은 배달을 시켜보니 기분이 새롭다. 배달 아저씨는 코앞에서 배달을 시키나, 바로 가게에 와서 먹지 하는 표정이다. 식사를 마치고 계획대로 도서관으로 가자니, 성한인 이왕 이렇게 늦은 거 놀잔다. 근데 우리가 논다는 게 홍상수 감독 영화처럼 술을 진탕 마시는 것도 아니고 목욕탕 가는 수준인데, 결국 목욕탕을 선택한다. 목욕탕 가는 것도 홍 감독 영화 같다. 나는 서울대입구역의 관악프라자 목욕탕으로 가자고 하니, 성한 이는 녹두거리의 한국사우나로 가잔다. 거기 싫다니 자기는 고시생 때 고생하던 추억이 서린 곳이라며, 목욕탕 가는 길 녹두거리도 걷고 싶다고 조른다. 이 새끼야 넌 그렇게 여길 떠났지만 난 아직도 이 바닥에 묶여 있는데, 니 추억의 거리가 난 현실인데, 가기 싫다고 발버둥 쳤지만 친구 추억놀이에 동참한다. 녹두거리라고 하는 신림동은 사법고시생들의 아지트로, 고시원과 독서실, 고시학원 등이 밀집해있다. 학생이라는 지출 수준에 따라 형성된 저렴한 생활비용이, 서울 타 지역의 영세민이 몰려 한때 소문으로 여기 4만 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4만 명이면  전북 순창군 인구보다 많은데, 그게 가능한지 알 수 없다. 지금은 사법고시가 폐지될 것이라 그때의 화려했던 밤거리 전성기를 볼 수 없다. 성한이는 자기 고시할 때 화려했던 녹두거리의 토요일 밤이 오늘 와보니 다 죽어버린 분위기가 생소하단다. 사법고시 친 날에는 이 거리에 사람이 아무도 없단다. 시험을 마쳤으면 그날 밤 한잔해야 하지 않나. 근데 고시생들은 아, 놀지 말고 공부 더 할걸 후회하며 아무도 거리로 나오지 않고 방에서 한숨만 쉰단다. 고시는 합격한 사람보다 포기하고 그만둔 사람이 더 대단하다며, 그걸 그만둘 수 있는 게 보통일이 아니란다. 그러고 보니 소설가 김훈은 담배를 끊으려고 산에 올라가 울면서 옷을 찢으며 참았다고 하던데, 담배야 나쁜 것이라도 자기가 좋아서 피는 선택이지만, 고시는 인생의 미래에 대한 선택인데, 합격 안 되는 걸 안 된다고 응시를 멈출 수 있는 건 담배 끊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 아닐까.      


목욕을 마치고 난 뒤 성한이는 집으로 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눕는다. 오늘 하루 동안 처음으로 침대에 눕는다. 실직 이후 가장 만족스러운 피로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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