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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Jul 06. 2019

사색69. 들숨 한번, 날숨 한번

4월 30일(수)

어릴 땐 어려움을 마주하면 못 참는다. 엄마, 아빠는 징징거리는 자식에게 사탕을 준다. 어려움은 잠깐의 달콤함으로 위장시킨다. 근본적인 문제는 위장 발림으로 극복할 수 없다. 삼십 대가 된 지금, 실직이라는 어려움은 사탕 같은 잠깐의 처방이 아닌 본질적인 대응으로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 여전히 사탕 같은, 임시적인 처방을 원하지만 인내를 하면서 극복하면 내면의 성장이 따라온다. 어젯밤 잠들기 전 다 포기하고 싶어, 지금 들이마시는 들숨과 내뱉는 날숨 호흡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다고, 들숨 한번, 날숨 한번, 들숨 한번, 날숨 한번, 들숨 한번 하다가 멈추면... 모든 게 끝나지 않을까 하는데 막상 눈을 뜨면 여전히 들숨 한번, 날숨 한 번을 잇고 있다. 인내하는 데 호흡부터 해야, 호흡이라도 해야 한다.      


모처럼 아침에 눈을 뜬다. 침실 창문 너머 미명이 밝았는데 알람이 울리지 않는다. 알람이 고장 났나 싶어 살펴보니 아직 오전 7시도 안됐다. 늘 실패하지만, 어쨌든 아침에 일어나려고 알람을 맞춰 놓는데, 오늘은 알림이 울리기 전에 일어난 것이다. 별일이 다 있구나 싶어 다시 잔다. 눈뜨고 있어 봐야 괴롭고 답답하니 달콤한 꿈이라도 꾸고 싶어서 아예 울리지도 않은 알람을 해지하고 다시 침대로 간다.      


꿈을 꾼다. 인도풍 호텔 꼭대기 층, 신혼여행을 온 듯한 부부가 투명 유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간다. 내려가는 투명 엘리베이터 안에서 부부는 밖으로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꿈을 꾸는 나는 이들을 3인칭 시점으로 바라본다. 갑자기 호텔이 혼란스럽다. 사람들이 우왕좌왕, 엘리베이터 속 부부는 버둥거리는 사람들을 관조한다. 부부 역시 혼란 속에 있으면서도 그 혼란을 자기와 관계없다는 듯 관조적이다. 부부는 누구일까, 호텔이 혼란스러워진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해하며 꿈에서 깬다. 잠시 멍하게 있다, 왜 하필 인도일까. 아니 익숙하지 않은 이국 풍경을 인도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신혼부부, 혼란, 투명 엘리베이터, 특별힌 해몽을 하기 어렵다. 여러 이미지의 조합인 듯.     


점심을 컵라면으로 때우고 학교 해동 도서관으로 간다. 창가에 자릴 잡고, 얄싸한 마지막 4월의 햇살을 맞으며 어제 읽던 성경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를 읽는다. 요셉은 우연한 기회에 감옥에서 이집트의 왕 파라오의 기이한 꿈을 해석하게 된다. 어제까지 감옥에 있던 죄수가 아무도 해석하지 못했던, 왕을 밤잠 자지 못하며 고민하게 만든 꿈을 해석해낸다. 그의 해몽은 앞으로 다가올 이집트의 가뭄을 예언하는데, 국가 재난을 대비하기 위해 가뭄 전 풍년 때에 식량 저장을 해결책으로 제안한다. 해석에서 대책까지, 파라오는 요셉에게 총리라는 막강한 자리에 임명해 대책을 구현하도록 맡긴다. 요셉이 노예살이, 감옥살이하다가 순식간에 강대국의 총리가 된다는 이 챕터는 대한민국 출세지향 기독교인이 사랑하는 장면이다.      


요셉에 대한 해설서를 낸 찰스 스윈돌 목사는, 하나님은 우리를 특정한 목적에 맞게 쓰려고 한다. 그전에 고통, 고난을 필수로 훈련 과정에 포함시킨다. 정금이라는 상태, 불순물을 제거한 뒤 온전한 상태에 이르러 일을 맡긴다. 내 생각에 그가 말하는 온전한 상태라는 건 실력이 아닌 인격 차원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런데 고된 훈련이 도대체 언제 끝나느냐, 그 시점은 훈련받는 사람이 판단할 수 없다. 이 정도면 된 거 아닌가 하지만, 그건 훈련시키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 신앙인이라면 그 고난의 끝은 하나님에 달려 있다. 성경 창세기 요셉의 경우, 그가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기 전까지 얼마나 길고, 지루하고, 고통스럽고, 외면받고, 평범하고, 단조롭고, 쓸쓸했나. 마냥 같은 비루한, 비관적인 하루를 견디며, 외적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변화를 찾을 수 없지만, 내적으로 단련한다. 변화한다. 단련이라는 목적에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기다리게 하는 것, 인내 아닐까. 이런 기다림을 잘 견딘 요셉은, 당시 최강대국 이집트의 왕 파라오 앞에서 담대하게 의견을 피력한다. 찰스 스윈돌은 이렇게 기다리는 시간 동안에 기다리게 만든 하나님, 신을 신뢰하는 것을 얻고, 미래 전망적으로 살자는 제안을 한다.    

    

철저하게 외면받는 사람의 인내, 그 끝! 나 역시 지금 실직 상황, 어제와 같이 아무 변함없는 무료한 하루, 이 하루를 요셉처럼 하나님의 개입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믿어야 하는데, 아니 믿을 수 있다. 뭔가 신적 계획이 없이 이런 실직이라는 비극을 맞는 거라면 난 지금 당장 미쳐버릴 것 같다. 뭔가 있을 것이다. 노예로 살고, 감옥에 갇힌 요셉에게도 그 과정을 잘 견디어 출세라는 결실이 있듯이, 나는 적어도 출세는 아니더라도 이 상황을 잘 견딘다면 어떤 보상이 있을 것이다. 그동안 교만하고, 아는 척하고, 다 해낼 수 있다며 자신하고, 내 계획으로 살아가려고, 소득 증대만을 추구하던 자세에서 불순물을 없애고, 신의 목적과 내 인생에 간섭하는 것을 기대하는, 예상하지 못한 불행과 비극에 신앙적인 자세로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성장, 변화해야겠다. 불순물이 없는 온전한 금같이, 불순물을 태우기 위해 고통스럽더라도, 요셉 흉내를 내야 한다. 실직이 사장, 부장 그 누구 때문이 아닌 절대로 나의 태도에 따른 결과라고, 그걸 수정하는 시간이 나를 집중하는 시간일 것이다. 사실 주변에서 내 상황을 충분히 이해해주는 조력자도 없다. 혼자 이 시간을 견디는, 인내할 수 있는 자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살면서 이런 시간이 언제 얼마나 있을까. 또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잘 깎이고, 빚어지고 싶다. 찰스 스완돌 목사는 계속 말한다. 요셉도 했으니 당신도 할 수 있다고.      


해가 지는 노을을 보면서 집으로 간다. 도시의 하루가 어둠에 잠기기 전에 마지막으로 붉게 탄다. 어둠은 많은 것을 생략해버린다. 실직자가 졸업한 대학교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내는 게 처량하다. 피곤하다. 씻지도 않고 자련다. 곧, 5월 연휴가 있는데, 서울에서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 주말께 고향 부산으로 갈까 보다. 어머니랑 시간을 보내고. 아무래도 이 시간은 내 인생에 대한 내 생각과, 신의 생각, 어머니의 생각, 내 이력서를 받아보는 인사권자의 생각, 그 사이의 편차를 줄이는 시간 같다. 이걸 줄이는 게 목표이지만 줄이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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