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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치 Sep 13. 2021

한국사람끼리 영어를 쓸 때

미국에서만 하는 눈치게임. 서로가 한국인인 것을 짐작하면서 계속 영어를 쓰는 것. 한국말과 달리 영어는 존댓말이 없어서 한국처럼 호칭 정리가 필요 없다. 나는 이 눈치게임이 한국어가 주는 피로함을 피하는 무언의 합의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사귄 교포 친구들은 대부분 나보다 어리다. 영어는 우리를 친구로 만들어주었다. 한국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아도 아예 못하는 척을 하는 교포들을 많이 봤다. 친구는 언젠가 한인교회에서 "형이라고 해, 이 새끼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간혹 교포들과 한글을 섞어서 얘기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 각자의 언어가 낼 수 있는 다정함이 버무려졌다. Come to my house, I'll make you 집밥. 한국어를 일부러 안 쓰면서도 내심 한국어를 더 잘하고 싶어 하는 교포들도 있었다. 나는 한국어 선생님이 되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얘기했다. 검은 머리가 밥풀이 될 때까지가 아니고 파뿌리야. 왜? 밥풀은 머리카락이 되기에 너무 두껍잖아. 아. 


한 때 새로 알게 된 사람에게 내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에 대해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었다. '원어민 발음'이라던가 '오~'하는 반응은 나의 심경을 복잡하게 했다. 발음을 논할 때 어떤 발음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인지, 미국의 공용어가 영어가 아닌 것, 누구를 원어민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 등. 한국에서 영어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한다. 영어가 언어가 아닌 스펙이기 때문이다. 간혹 내가 미국인이라고 밝히면 대뜸 영어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 영어는 대화라기보다 개인기 요청에 가까웠다. 


한국에서 영어를 하면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돈을 주었다. 한국에서 영어강사 일자리를 구할 때 카페에서 수강생들과 '프리토킹'을 하는 식의 수업에 면접을 보러 간 적이 있다. 면접관이자 진행자는 나에게 옆에서 영어로 맏받아 치면서 수업에 참여하라고 했다. 내가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자, 면접관은 공식 질문이라며 "Do you have a boyfriend?"라고 물었다. 질문의 무례함 자체는 고사하고 개인의 성적성향은 겉만 보고 알 수 없으니, "Do you have a partner?"이라고 물어보는 게 맞다고 정정했다. 면접관은 중간에 (사실은 나를 족치려고) 쉬는 시간을 갖자고 했다. 그가 살벌한 표정으로 첫마디를 꺼냈다. "내가 영어 가르치라 했지, 문화 가르치라고 했어요?" 


그는 수업이 끝나고 회식에 참여하겠냐고 물었고 나는 미국 문화에 맞춰 싫다고 했다. 당연히 면접은 떨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영어를 했어야 했는데 대화를 해서 망한 면접이었다. 


집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있는 동네 슈퍼의 사장님은 한국인이다. 어느 날 가게 앞에서 그분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고 한국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사장님은 아저씨 두 분과 맞담배를 피고 계셨는데 한국어를 쓰셨다. 한국에서 중년 여성이 가게 앞에서 담배를 태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나는 그 모습이 '쿨'하다고 생각했다. 그분도 아마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짐작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갈 때마다 직접 계산을 해주셨는데 한 번은 내 가방에 '광천김'이라고 쓰여있는 재래식 김이 삐져나와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계산을 할 때, 청과물을 담는 봉지를 찾아 헤맬 때, 내 키보다 높은 선반의 물건을 집으려고 할 때 단 한 번도 한국어로 말을 건 적이 없다. 며칠 전에 계산을 하는데 현금이 조금 모자랐다. 동전을 더 꺼내려고 하는데 사장님이 '잇츠 오케이' 하셨다. 내가 영어로 동전이 더 있다고, 가방에서 꺼내려고 하자 이미 꺼내놓은 동전을 가져가시면서 들릴락 말락하게 혼잣말을 하셨다. "아휴, 주세요." 


나는 '고마워요'라는 말이 새어 나올까 봐 '땡큐'하고 가게를 나왔다. 인심을 쓸 때는 한글을 쓸 수밖에 없구나, 생각을 하면서. 한국 밖에서 만나는 어르신들이 나에게 끝까지 영어를 할 때 존댓말을 안 써도 어쩐지 존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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