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사는 사람은 아니고요,
"스트립클럽"
이 자리에 뭐가 생겼으면 좋겠나요, 라는 물음에 돌아온 답이었다. 내 미간은 이성이 말릴 새도 없이 확 구겨졌는데, 나의 반응을 살피는 그의 얼굴에서 마스크가 소용이 없을 만큼 내 표정이 다 새어나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뉴욕으로 돌아온 뒤, 작년 3월부터 함께 일했던 사회운동 단체의 사람들을 실물로 처음 마주했다. 그들은 이스트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코로나 사태가 터진 이후부터 함께 일한 터라 1년 반이 넘도록 온라인으로만 교류했다. 그들은 올여름부터 이스트 뉴욕 내에 도시 소유의 공터 앞에서 설문조사를 해왔는데, 근처에 사는 주민들에게 공터가 개발이 된다면 어떤 목적으로 쓰였으면 좋겠는지 물어보는 일이었다.
내 구겨진 미간에 그가 당황했고, 그가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해가 쌓일 틈도 주지 않고 옆에 있던 단체 사람이 크게 웃으며, "그 스트립클럽은 여성전용 스트립클럽이어야 할 걸요?" 하고 당차게 말했다. 그러자 그가 개구진 표정으로, "그럼 내가 스트리퍼가 돼서 춤을 출게요." 하고 말했다.
취미로 소비하던 사회과학의 생산자가 되고부터 정치적 올바름은 생활의 구석구석에 뿌리를 내렸다. 관점을 개발하고 불편함을 사유하는 일은 퇴근이 없었다. 전문분야에 깊이 빠져들수록 단순한 사회생활마저 삐걱거리고 오류가 생겼다.
한국에서 장기체류를 하다 보니, 평생 참석해본 적 없는 경조사를 여러 번 가게 되었다. 청소년기부터 해외에 살던 터라 성인이 되고 처음 만난 친척 어른들은 안부인사로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물었다. 당황스러웠다. 결혼에 관심이 있냐고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닌가, 아니 그전에 이성애자냐고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닌가, 아니 그전에 친척이어도 초면에 저런 질문을 한다고? 가족행사를 갔다 오면 몇 시간은 누워있어야 했다. 나를 잘 이해하는 친구들에게 왜 그들은 다짜고짜 내 '난자의 신선함'을 걱정하는 거냐고 울분을 토했다. 지인들은 내가 하는 얘기를 대부분 웃어넘겼는데, 의외로 잘 모르는 사람이 한 얘기가 도움이 되었다.
"할 말이 없으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거잖아."
그 말은 내 안에 더 이상 증발할 물이 없어 씩씩거리는 냄비에 찬물을 부어주었다. 나는 친척들이 묻는 안부의 방식이 주는 불편함만 떼어서 광학현미경으로 있지도 않은 내막까지 구석구석 살펴가며 기분 나빠하고 있었다.
뉴욕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대학원 사람들은 자기소개를 하면 이름과 함께 'pronoun'을 얘기한다. 그것은 겉모습으로 성별을 지레짐작해서 호칭을 부르는 것을 방지하고 성별 자체로 호칭이 불리는 것을 거부하는 이들을 존중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이런 문제들을 늘 고민하는 사람들이고, 더 정확히는 그 고민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다.
언젠가 지도교수에게 박사논문 주제에 대한 얘기를 꺼냈을 때, 그 주제라면 17세기 문헌부터 팔 필요는 없고, 간략하게 19세기부터 파면되겠다고 쾌활하게 얘기했다. 나는 운이 좋아서 한 주제에 대해 400여 년 대신에 200여 년간 나온 문헌만 훑으면 되고, 그것은 내가 농사를 짓지 않는데 매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종종 정확함 자체에 집중하느라 정작 뭐가 정확해야 하는지를 자주 까먹었다.
지난 일 년 반 동안 단체 사람들과 온라인 미팅 중에 누군가는 종종 나를 '국제적인 학술가'라고 불렀다. 내가 한국에서 온라인 미팅을 참여한다는 사실이 그들의 사회 운동이 국제적 유명세를 타는 느낌을 주는 듯했다. 나는 미국 여권을 쓰고, 방세를 아끼기 위해 한국에 갔으며, '학술가'보다는 대학원생 나부랭이에 가깝지만 그를 정정한 적은 없다. 미팅은 나를 설명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수식어는 목이 턱 막히는 기분과 소리 없는 한숨을 자아냈다. 이 얘기를 교수에게 토로하자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게 그 사람들이 너를 가장 편하게 대할 수 있는 프레임이 아닐까?"
설문조사를 하는 동안 상의를 탈의한 남자가 카트에 정체불명의 물건들을 가득 싣고 공터의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갔다. 지나가던 동네 주민이 그를 향해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이유인즉슨 그가 매번 공터에 쓰레기를 버려 쥐들의 개체 수가 늘어나서 주위에 피해를 입힌다는 것이었다. 동네 주민은 벌써 몇 번이나 이 일로 그 남자와 일방적인 실랑이를 벌인 것 같았다. 남자는 개의치 않고 공터에 물건들을 풀어놓았고, 동네 주민은 설문 조사를 하고 있는 우리에게 와서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같이 설문조사를 하던 누군가가 동네 주민과 함께 그 남자를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익숙하다는 듯 하던 일을 하던 남자는 그제야 우리를 힐끔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푸에르토리코에서 온 이민자로 스페인어로만 이야기했다. 동네 주민은 그에게 엄한 동네 공터를 정글로 만들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쳤다. 설문조사를 같이 하던 동료가 나에게 경찰을 불러야 할 것 같다고 해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지만 왜인지 쉽사리 번호를 누를 수 없었다.
나는 단체 사람들 중 푸에르토리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차분한 표정으로 남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뜻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어떤 비난의 의도도 없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몇 분간 대화를 나누는 동안 길을 지나가던 두 명의 남녀가 멈춰서 그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 남자와 아는 사이인 듯했다. 두 남녀가 가고, 남자가 빈 카트를 끌고 공터를 나갔다. 두 남녀와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온 단체 사람이 별일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우리에게 와서 이야기하기를, 그 남자는 아이가 셋이 있고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쓰레기 중에 팔만한 것들을 모아다가 공터에 보관해놓은 뒤에 다시 그것들을 판다는 것이다.
남자를 향해 큰소리치던 단체 사람은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렇다고 공터에 쓰레기를 쌓아놓고 동네 전체에 피해를 주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얘기했다. 그러자 다른 누군가가 얘기했다.
"노력하는 거잖아."
몇 마디 농담이 오고 간 후, 단체 사람이 '이 친구가 설문조사를 마무리해줄 거예요.' 하고 다시 그를 나에게 안내했다. 그는 동네에 주차장이 없어서 매번 불법 주차 티켓으로 많은 지출을 하고, 공터의 쥐들이 트럭의 타이어를 갉아먹어서 차를 끌고 다닐 수 없으며, 심장 수술과 장애로 거동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장거리를 걸어 다녀야 한다고 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딸과 사위를 데려와서 설문조사를 시켰다. 그의 스스럼없는 태도에서 내가 좀 전에 지은 날 선 표정에 베인 건 나 스스로였나, 생각했다.
사회과학에 빠져들게 된 계기가 뭐였을까. 종종 눈살을 찌푸리던 일들은 대부분의 경우 몇 없는 선택지 중 최선의 결과였다. 관점을 개발하고 불편함을 사유하다보면 눈살을 찌푸리는 대신 선택지를 넓히는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내 편협함의 테두리에 부딪힐 것이고, 그것은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동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