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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치 Sep 22. 2021

정체성이 생김새가 되지 않을 때까지

토요일은 기부금 행사에 다녀왔다. 나는 행사 준비를 돕기 위해 행사 시작 2시간 전에 먼저 도착했는데 아무도 없었다. 장소는 연구 협업을 하는 비영리 단체 사람의 집 뒷마당이었고, 행사를 위한 테이블과 의자 정도만 간단히 설치되어있었다. 의자에 앉아서 몇 분 동안 멍을 때리고 있었는데, 어떤 여자가 뒷문으로 들어왔다. 탈색한 긴 금발에 양팔에 타투가 있었고 내 또래쯤 돼 보였다. 그가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고 그가 집주인의 이웃이거나 룸메이트라고 생각했다. 그가 집으로 들어가 직접 만든 칵테일을 가져왔을 때 나는 그도 봉사자라고 짐작했다. 그 후 두 시간 동안 나는 그에게 물건이 어딨는지, 그릇을 옮겨달라던지 하는 부탁을 자연스럽게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2018년부터 재임한 뉴욕주의 상원 의원이었다. 


행사가 시작되고 사람들이 점차 마당을 채웠다. 집주인은 정장으로 갈아입고, 칵테일을 만들던 여자를 큰 소리로 상원의원이자 자신의 여자 친구라고 소개했다. 나는 잘못들은 줄 알고 그의 이름을 검색했는데 성조기를 배경으로 한 의원 사진이 바로 나왔다. 그 순간 느낀 당황스러움은 뭐였을까? 그가 봉사자라고 생각해서 그에게 이것저것 시킨 것? 정치인은 봉사정신으로 하는 게 맞는데. 기억을 되짚어보니 나는 그와 통성명을 건너뛰고 행사 준비에 필요한 간략한 대화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만약 그가 자신을 상원의원이라고 소개했으면 어땠을까, 높은 확률로 '오, 쿨'이라고 반응했을 수도 있다. 그 반응은 "네가 국회의원이라고?"라는 어느 정도 진심이 담긴 반응으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27살 때부터 상원의원으로 일한 그에게 아주 익숙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도 익숙한 감정이었다. 나는 아직도 신분증 없이 술을 사지 못한다. 앳되 보이는 외모는 학회 발표를 가거나 학부생들 강의를 할 때 장애물이었다. 학회를 주최하는 호텔 스태프는 나를 '아가'라고 불렀다. 시험의 시간제한에 불만이 있던 중년 남성의 학부생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리를 지르고 온라인 강의를 나갔다. 아마 높은 확률로 나는 그들에게 처음 보는 동양인, 여성, 20대의 학회 발표자이거나 대학 강사일 것이다. 나는 대학교 4학년 마지막 학기 때 처음으로 흑인과 동양인 교수의 수업을 들었다. 내가 다음 유색인종의 교수를 만났을 때 '오, 쿨'이라고 반응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이다. 


미국에서 나는 종종 레즈비언이라는 오해를 받는다. 레즈비언인 친구가 말하기를, 내가 겉보기에 '이성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없어 보여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그 근거로 맨얼굴, 노브라, 늘 넉넉한 검은색 옷차림, 짧은 머리가 있었다. 비슷한 이유로 서울에서는 미국에서 오셔서 그런지 자유분방하시네요, 수수하시네요, 라는 소리를 들었다. 


요 근래 몇 년간 페미니스트를 캐릭터화한 이미지들을 인터넷에서 종종 봤다. 아마 창작자는 페미니스트의 '못생김'을 전시하려는 의도이겠지만 내 시선에서 흔한 인간의 형상이었다. 누군가의 기본값이 다수에게 '이탈'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사회적 약점이다. 사회적 약점을 가진 이들이 공공장소에 모여서 걷는 것 (퀴어 퍼레이드), 서있는 (집회) 행위가 사회운동으로 읽히는 이유다.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임에도 불구하고 늘 정치적으로 읽히는 것은 다소 피곤한 일이다. 많은 미국인들은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면 북한에 대해서 물었다 (요즘은 방탄소년단에 대해서 묻는다.) 나는 한국인이기도 하지만, 미국인, 채식주의자, 반려묘의 친구, 누군가의 딸, 동생, 대학원생, 연구원, 여성 이기도 하다. 피곤한 상황들을 피하기 위해 어떤 정체성을 덮어놓을 때도 있었다. 


그가 의원인 것을 몰랐을 때, 그가 칵테일을 따라주면서 럼이 많이 들어가 있으니 주의하라고 했다. 더 좋다,라고 대답했고 그가 싱긋 웃었다. 그때의 그는 의원이었을까? 미리 알았더라면 긴장해서 칵테일 맛을 음미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마웠다. 내가 먹어본 칵테일 중에 가장 맛있었고, 내 머릿속의 '국회의원'의 생김새가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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