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성추행을 경험했다. 최소한의 업무만을 이행하면서 며칠 누워있었다. 사람은 스스로를 개인으로만 인지할 때 자신을 뜯어고치려고 한다. 나는 계속 생각했다. 내가 그 자리에 그 시간에 없었다면. 상황 파악을 좀 더 빨리 했더라면. 그때 그 표정을 짓지 않았더라면. 거듭된 생각 끝에 나중에는 머리를 삭발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여자처럼 보이지 않았더라면. 나는 나와 같은 경험을 한 타인에게는 절대 하지 않았을 말들로 스스로를 괴롭혔다.
몇 년 만에 만나게 된 지인이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실제로 그런 사례가 주변에 있냐, 그건 영화여서 과장이 섞인 것이 아니냐 하는 말을 했다. 그가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보다 보편성의 증명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곧 그의 위치라고 생각했다. 그의 발언은 다른 의미에서 나에게 보편성을 생각하게 했다. 영화에 나오는 82년생 김지영은 아파트에 살고, 임신과 출산으로 경력단절을 경험한 여성이다. 여성은 경력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의 조건이 남성과 다르다. 예컨대, 동일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지고 한 가정 내에 태어나도 아들의 학업을 지원하기 위해 일찍이 취업을 한 딸들의 사례는 흔하다. 그들은 언젠가 단절이 될 커리어라도 시작한 김지영을 공감하기 어려울 수 있다. 더 나아가 82년생 김지영과 '베트남 신부'에게 결혼, 임신, 육아의 의미는 다르다. 정도의 차이일 뿐 결혼, 임신, 육아가 여성의 사회적 활동과 이동권을 제한한다는 것은 변함없다. 그 의미의 다양성은 문제를 개인의 영역으로 치부하는 데 쓰일 것이 아니라 문제의 범주를 넓히는 데 쓰여야 한다.
전에 참여했던 페미니즘 독서모임에서 '남성이나 트랜스젠더가 여성운동의 시위, 집회, 행진에 참여하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주제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다. 여성이 경험하는 사회적 억압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누구든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누군가는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공유하지 않은 이들 또는 도덕적 우월감을 전시하기 위해 참여하는 이들이 본질을 흐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여성이라는 것은 어떻게 증명해야 하는 것인가. 나는 아직도 여성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여성은 생물학적으로만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 스스로 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여성으로서 인식되었을 때 불편하지 않다는 감정 하나뿐이다. 이런 내가, 호르몬제를 복용하고 목숨을 건 수술을 감수하면서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자 하는 이들보다 쉽게 여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더 확실한 것은 여성의 정의가 '남성 가해자에게 잠재적 범죄 대상으로 인식될 수 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을 가해자의 시선과 전제조건으로 정의하는 것, 사회운동을 하는 여성을 피해자의 정체성으로 국한하는 것 역시 억압이다. 사회운동의 참여자들의 동기의 순수성을 감시하는 것이 위계이며 단합은 방향성이지 목적이 아니다. 가부장제도를 답습, 유통, 재생산하는 이들은 남성들만이 아니다. 살면서 조신함은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더 자주 강요받았다. 다만 나는 그것을 '조신하지 못했을 때'의 불이익에 대해 더 잘 아는 여성들이 잘못된 언어로 건넨 우려라고 생각했다. 사람의 얼굴을 했을 때 억압은 쉽게 명명하고 처벌할 수 있지만, 억압을 허용한 구조를 고치지 않는 한 바뀌는 것은 가해자의 얼굴뿐이다.
누워 지내는 동안 지금까지 성적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낀 모든 경험들을 떠올렸다. 나는 대게의 피해자가 그렇듯, 없던 일이 되길 바라며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행동했고 조금이라도 사건의 무게를 더는 쪽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그 방법이 이제는 먹히지 않았다. 사건을 묻으려는 나와 그런 나를 쫓아다니며 비판하는 내가 있었다. 네가 여성 인권에 관해서 한 말들은 다 결국 허세였고 스스로를 가해자의 시선에서 제단하고 있고 침묵으로써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 거야. 스스로를 지칠 때까지 패다가 과거에 비슷한 경험을 한 지인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나의 경험들 속 내가 다시 보였다. 모른 척이 아니라 상황이 고조될까 봐 안전한 곳으로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태연한 척하고 있었던 것. 묵인하려 한 게 아니라 피해자로 살아가고 싶지 않았던 것. 어디선가 알 수 없는 씩씩함이 솟아올랐고 이 모든 일들을 적극적으로 기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은 앞으로 만들어갈 연대의 밑천이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애틀랜타에서 백인 남성이 총기난사로 8명의 아시아인 여성을 살인했다. 사건 당시 나는 한국에 있었고 미국에 있는 아시아인 친구들에게 연락해 안부를 물었다. 뉴욕에 사는 친구는 울면서도 피해자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려 뉴스를 보고 또 봤다. 주말에 아시아인들이 이끄는 시위를 나갈 것이라고 했다. 친구는 말했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집에서 가만히 앉아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