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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치 Oct 30. 2021

게으르게 선하고 싶어서    

토요일은 협업하는 비영리단체와 전략회의를 가졌다. 지난 한 해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고, 어떤 성취가 있었는지, 앞으로의 목표와 전략을 설정하는 자리였다. 그중 인상 깊었던 부분은 단체를 정치적 로비가 가능한 조직으로 바꾸는 목표였다. 현재 단체는 세금 납부를 하지 않고 정치적 로비를 할 수 없는 형식의 조직으로 등록이 되어 있다. 이 형태는 정부로부터 활동 지원금과 세금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나마의 모든 활동도 자원봉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단체는 현재로서 세금 혜택과 정부지원금을 포기할 형편이 되지 못한다. 세금 혜택을 주는 대신 비정치적 기관으로서 활동영역을 제한하는 방식은 비영리재단의 목표에 한계를 둔다. 이를테면 재단이 추구하는 정책을 추진하도록 정치인에게 압박을 가할 수가 없고, 재단 사람이 소속을 유지하면서 선거에 출마할 수 없다. 그들은 "공격적으로" 사회개혁을 추진하고 싶어 했다.


많은 비영리재단은 그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부정의'에 의존한다. 정치적 행위를 제한하는 것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보다 수습에 초점을 두게 한다. 그리고 문제의 유지는 기관의 역할을 유지시킨다. 예를 들어, 노숙인을 위한 임시보호소는 주거취약계층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현상유지를 한다. 더 나아가 임시보호소의 재정지원금은 노숙인의 발생을 전제로 한다. 이 때문에 임시보호소의 활동 자체를 비판하거나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정부가 비영리재단의 활동에 불필요한 제약을 거는 것이다. 이러한 제약은 마치 비영리재단이 정부의 복지가 미처 닿지 못한 곳을 책임지는 연장선이라는 착각을 심어준다. 


1년 반 남짓 단체와 일을 하면서, 그들이 민주주의를 실현할 공간을 개척하는 일을 한다는 생각을 했다. 정부가 마련한 정치참여 제도는 선거로 제한되어있다. 예를 들어, 뉴욕시에서 재개발을 추진할 때 시민들은 찬반 여부에 대한 투표권을 직접 행사할 수 없다. 뉴욕시장이 선출한 위원회가 투표를 통해 결정을 내린다. 시민들은 그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시장과 의원을 선출함으로써 결정권을 행사한다. 반면 내가 함께 일하는 단체는 매주 토요일마다 개발이 안된 공터 앞에 책상과 의자를 펼쳐놓고 지나가는 이웃들에게 이 공간이 무엇이 생기면 좋을지 묻는다. 그게 그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다.  


내 연구주제를 얘기할 때 종종 '착하다'는 반응을 들으면 당황스러웠다. 내가 추구하는 일은 선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고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선도 정의(justice)도 아니다. 굳이 정의(define)를 내리자면 선과 정의(justice)를 어떻게 정의(define)할지 의논하는 일에 조금 더 가깝다. 내 역할이 사회적 약자의 의견을 대변하거나 옹호하는 것이라면 그들이 담론의 중심이 되었을 때 내 역할도 사라진다. 그들이 필요한 건 권력이지 누구의 대변도 옹호도 아니다. 당연히 나는 그들 편이고 대놓고 편협할 것이다. 다만 학자로서 내가 할 일은 모두의 의견이 동등한 무게를 가지는지 끊임없이 점검하는 일이다.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많은 일들을 선으로 착각하는 것은 심각한 폐해를 불러일으킨다. 선은 지키는 게 아니라 베푸는 것이다. 이는 곧 선의를 베푸는 측의 권력유지를 도모한다. 이를 테면 Black Lives Matter 시위에 참여하는 것을 착한 일로 여겨진다면, 흑인 인권을 옹호하는 일이 자선이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선과 정의와 민주주의가 별개라는 소리는 아니다. 꽤 오랫동안 어쩌다 이 연구주제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이 단체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는지 고민을 했으나 아직도 그 이유를 잘 모른다. 그 과정속에는 간간히 베푸나 마나 한 선도 시시하게 있었을 것이다. 나는 착하기보다, 나쁘게 잘 살 자신이 없는 어정쩡한 사람인 것 같다. 재난, 공포, 전쟁영화에 남을 돕거나, 정의롭거나, 충성심이 높아서 제일 먼저 죽는 사람들 다음에 서 너번째쯤에 죽는 그런 유형. 


내가 생활 속에서 추구하는 선의 동기는 정의사회의 구현보다 '사회악에 가담하고 싶지 않음'에 가깝다. 이를테면 비건 지향이 그중 하나인데, 많은 이들은 내가 동물복지를 위해 비건 지향을 한다고 짐작한다. 어떤 이들은 내가 채식을 한다고 하면 반박할 태세로 동물복지나 기후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데 그럴 때 나는 당황스럽지만 사실대로 이야기한다. "난 사실 그 주제에 대해 꽤 무지하고 무관심한 편이야." 


나는 지구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타오르고 있는지, 해마다 얼마나 많은 밀림이 없어지고 있는지, 공장식 가축의 전말에 대해 전혀 아는 바도 없고, 찾아본 적도 없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고기를 먹는 것이 어떤 해를 가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고 그 해악의 크기와 해결 방식의 효율성(기술과 혁신)에는 흥미가 없다. 동물해방이나 친환경 사회에 대한 목적의식보다 졸렬하게도 죄책감 없이 고기를 소비할 자신이 없어서 채식을 한다. 


지난 1년 반 동안 협업을 하면서 연구와 별개로 그들이 주최하는 시위나 행사장에서 물건과 음식을 나르고 정리를 하는 것은 나의 쓸모에 대한 고민을 덜어주었다. 사실 연구를 핑계로 나는 내 연구대상들을 덕질하고 있다. 내가 상상만 하고 탁상공론을 펼치는 동안 내가 꿈꾸는 미래는 그들이 개척하고 나는 그걸 기록한다. 


나는 최대한 수동적으로 살고 싶다. 그리고 수동적으로 살아도 선하게 유지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이를테면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사 마시는 것만으로 죄수 노동의 착취에 가담하지 않는 구조에서.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기본값들을 적극적으로 바꿔야 한다. 게으르게 선하고 싶은 마음에 부지런히 연구하고 공부한다. 뭔 개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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