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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치 Nov 23. 2021

되물려주고 싶지 않은 담담함    

인종차별에 대하여 

나는 학과에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감을 유지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며 생활한다. 최근에 지도교수가 학과 회의에 참석을 제안했다. 정말 죄송하지만 이번 주 회의 주제가 뭐죠,라고 물어보자, microaggression이라고 했다. 한숨이 나왔다. 그 주제에 대해서 할 말이 많지만 동시에 청자를 생각하면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내 전공학과의 대학원생들은 대부분이 (여러 면에서) 소수자인데 교수들은 모두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백인 노인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인종차별주의적 발언과 처우에 대한 문제로 몇 년째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온라인으로 진행된 학과회의에 처음으로 얼굴을 내비쳤다. 한국의 시차를 핑계로 1년 반을 피하다가 오랜만에 맞이한 교수들은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회의에는 차별적 발언에 대한 분쟁을 조정하는 스태프도 있었는데 교수는 학생들이 제기하는 microaggression에 대한 예를 들어줄 수 있냐고 물었다. 스태프는 덤덤하게 '아시아계 학생들에게 영어를 잘한다고 하는 것'을 예로 들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웃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도 웃고 있다.) 나는 비슷한 칭찬을 적어도 1년에는 한 번씩 듣는다. 교수들이 내가 아시아 인종이기 때문에 은연중에 '외국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즉 내국인을 백인이나 흑인으로 한정하는 것)을 드러내는 발언이었다. 이런 일들에 일일이 속이 상한 다기보다 대부분 웃어넘긴다. 평생을 겪어왔기에 인종차별을 대하는 데 있어 프로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스태프가 든 예는 꽤나 양호한 편이었다. 나는 어떤 교수가 다른 중국인 학생을 내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놀랍게도 그 교수의 수업에는 나와 그 학생 두 명뿐이었는데, 그 학생은 나와 달리 안경을 쓰고 머리가 길었다. 다른 아시아계 학생들과 나를 구분하지 못하는 교수들에게, 내가 겪는 인종차별의 경험에 대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까. 


작년 3월 뉴욕에서 첫 코로나 환자가 발병했을 때, 내가 미열이 있다고 수업에 빠지자 그날 저녁 학교로부터 누군가가 내가 코로나에 걸렸다는 신고전화를 했다고 연락이 왔다. 이 일은 내가 뉴욕을 1년 3개월 동안 떠나기로 한 결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학과회의 때 이 일에 대해 얘기를 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끝내 말하지 못하고 회의가 끝났다. 후에 지도교수는 내게 회의에 참석한 소감을 물었고 나는 이 이야기에 대해 털어놨다. 말하다 보니 얼떨결에 어떤 교수가 다른 학생을 내 이름으로 부른 것부터 다른 이야기까지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했다. 머쓱한 마음에 나는 사실 평생 겪어온 일이라 꽤 담담하다고 말했는데, 교수는 정색을 하고 답했다. 네가 담담하게 느낀다고 해서 그 일이 공정한 게 되는 게 아니야. 


microaggression은 어감의 엄숙함과 달리 대게의 경우 호의적인? 형태로 다가온다. 그것은 나의 경험이 아시아계 여성에 한하기 때문이다. 1년에 한 번쯤은 길에서 백인 남성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거나, 내가 모르는 아시아 언어로 말을 건다. 자신의 문화적 소양에 심취한 그들은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나의 반응을 살피는데, 그럴 때 나는 프로의식을 갖고 대답해준다. "You have one chance to apologize." (사과할 기회를 한 번은 주지.) 


가까운 주변의 미국인 친구들이 인종주의적 발언을 할 때도 있었다. 최근 사례로 친구는, "한국이 요새 엄청 트렌드야. 한국은 new japan 이 될 거야!"라고 말했다. 내가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어,라고 말하자 그는 오 마이 갓, 하더니 머리를 감싸 안고 주저앉았다. 그냥 미안하다고 해, 멍청아. 진짜 미안. 


또 한 번은 친구가 나와 다른 아시아 친구의 이름을 바꿔서 이야기했다. 내가 잘못 들은 줄 알고 그에게 다시 묻자, 그는 "내가 그렇게 얘기했어? 그거 정말 심각한 인종차별주의적 발언이다. 절대 그냥 넘어가지 마!"라고 소리치더니 할복이라도 할 기세로 석고대죄를 했다. 나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 괜찮진 않지만 그렇게 사과해준 것이 고맙다, 고 얘기했다. 그리고 문득 나이 든 이 친구와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는 아주 오래 친구가 되려 나보다. 


흉이 남은 상처들은 대게 나를 지나치게 도움이 필요한 대상으로 인식해 빚어낸 행동들이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영어교사는 나에게 교과서의 지문을 읽게 시켰다. 나는 애써 나의 억양에 무관심한 척 심드렁하게 지문을 읽었고, 내가 다 읽자 반 아이들에게 나의 '용기'에 박수를 치게 했다. 


이 일에 대해서 아주 오랫동안 까먹고 있었는데, 학부생들에게 편견을 주제로 강의하다가 이야기하게 되었다. 평소 히잡을 쓴 학생이 자신이 11살일 때 반지를 끼고 학교에 갔는데, 교사가 반 아이들 앞에서 혹시 결혼했냐고 물었다고 했다. 학생은 아니라고 했고, 교사는 문화의 다양성은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인정해도 괜찮다며 학생을 '달랬다.'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지도 까먹었던 나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학생에게 경험을 얘기해준 것에 대해 고맙다고 말했다. 


"네가 담담하게 느낀다고 해서 그 일이 공정한 게 되는 게 아니야." 나는 교수의 말을 여러 번 곱씹었다. 히잡을 쓴 내 학생이 수많은 불공정을 체화해서 담담함에 이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성가시게도 계속 학과회의에 나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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