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치 Dec 12. 2021

기회라는 판타지

 

추수감사절날 감사하게도 초대를 받아 친구의 집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평소 대화를 섞을 일이 없을 사람도. 


"Do you think it is government's responsibility to create job opportunities?" (정부가 고용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 


기회라는 판타지를 믿는다니. 친구의 친구로 그 자리에 온 나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주제를 전환했다. 33살인 그는 마흔에 은퇴를 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수익의 반을 세금으로 낸다고 투덜대는 걸 보면 연봉이 억대인 듯하다. 빨리 개같이 벌어서 이 하기 싫은 일을 어서 끝내야 하는 데 수익의 반을 세금으로 내려니 짜증이 나겠지. 더군다나 꿈을 좇는다거나 좋아하는 일을 한답시고 제 앞가림 하나 못해서 꾸역꾸역 하기 싫은 일을 하는 내 등골을 세금으로 빼먹다니. 


이 질문을 한 그는 상류층 사회에서 자란 중년의 기혼 백인 남성이다. 연구조사에 따르면 전과가 있는 백인 남성이 전과가 없는 흑인 남성보다 취업률이 높다. 이력서에 유색인종이라는 인상을 주는 이름이 불리하다는 연구는 심리학 교과서에 등장할 만큼 오래되고 진부한 사실이다. 그는 능력주의를 신뢰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그의 질문은 사실 설의법이었을 것이다. 


고용을 결정하는 요인은 무수하다. 정부는 그중의 일부이자 그 무수한 요인들의 관계 속에 있다. 이 질문을 답하려면 정부의 책임 범위를 책정하고, 고용 기회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정하고 시작해야 한다. 산기슭에서 나뭇가지로 만든 저주 인형을 애플파이와 거래하는 식의 고용이 아닌 이상, 세금이 부과되는 모든 고용의 형태는 노동시간, 노동조건, 임금 수준과 보장, 생산되는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수요와 공급 (해외무역상품이라면 외교관계까지), 심지어 출근 시간까지 (도로와 교통수단은 하늘에서 떨어지나) 정부가 개입되지 않는 과정이 없다. 쓰다 보디 산기슭도 정부의 토지 사용 규제에, 애플파이에 들어가는 재료도 농산물 거래의 가격 책정에 정부가 영향을 미친다. 


지금보다 더 미성숙했을 때 쉽게 돈을 벌고 싶어 하는 마음을 경멸했던 적이 있다. 돈이 쉽게 벌리려면 돈이 이미 많아야 하고, 돈을 쉽게 벌고 싶어 하는 마음은 지금 돈 벌기가 너무 어려워서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런 땅 하나 안 사두고 뭐했나, 몇 년 전 망원동을 걸으면서 친구가 말했다. 


당시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지만,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갈 자리를 잃은 상인들과 주민들은 생각하지 않고 기회주의적으로 생각하는 친구가 잔인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나고 보니 정작 잔인한 것은 내 생각이었다. 나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 '유리 바닥'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을 누리며 한량처럼 살다 보니 남의 살림살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다. 친구는 고등학생 때부터 미래를 염두에 두고 간호대를 들어가 휴학 한번 하지 않고 바로 취업, 몇 년째 3교대 근무를 하는 친구였다.


강남에 땅을 미리 사놓지 못한 (조)부모를 원망하는 마음은 사실 대단한 패륜도, 욕심도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자본주의가 만든 속상한 감정들을 점점 자주 목격했다. 돈이 안 되는 것을 (특히 예술과 정의를 추구하는 일) 좋아하는 스스로를 미워하는 마음, 좋아하는 일을 해서 스스로의 노동가치를 평가절하하는 마음. 그들은 딱 남들만큼이라도 벌고 싶다고 종종 말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돈이 안되고, 먹고살자고 하는 일은 먹고사는 것만 책임져준다. 남들을 임금노동자로 착취하고 싶은 마음에 자본가가 되려는 사람은 없다. 착취당하고 살지 않으려면 자본가가 되는 방법밖에 보이지 않을 뿐. 


1년 정도 집 근처 노숙자 보호소에서 카운터를 지킨 적이 있다. 내가 다소 심심해 보였는지 많은 이들이 와서 말을 걸어줬다. 몇 개월 같은 자리를 지키고 나니 점차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중 한 분이 공항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보호소에서 공항은 한 시간 반 정도 거리로 대중교통도 여러 번 갈아타야 해서 출퇴근이 번거롭지 않을까 했는데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벅찬 얼굴로 돈을 모아서 방한칸짜리 아파트를 임대할 것이라고 했다. 몇 주가 지나고 그가 울적한 얼굴로 근무시간이 파트타임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나는 집 근처의 마트에서 계산원을 구한다는 공고를 봤다고 그에게 얘기했다. 그러자 그가 단호하게 자신은 공항에서 일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말은 안 했지만 공항이나 마트나 최저임금 받는 것은 똑같은데 곧 해고당할지 모르는 곳보다 교통비도 안 들고 출퇴근 시간도 짧은 마트가 낫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었다. 연구실 친구에게 이 의아함을 얘기했다. 친구의 나긋한 목소리는 나를 부끄럽게 했다. 너도 돈 때문만에 지금 일 하는 거 아니잖아. 


며칠 전 룸메이트는 중대발표가 있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 1년 후면 졸업 예정인 의대를 때려치우기로 했다. 정말 축하한다며 당장 냉장고에 있는 맥주 두 캔을 따서 건배했다. 그는 두 달 뒤에 캐나다로 돌아가서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릴 것이라고 했고 우리는 맥주를 마시며 앞으로 두 달 동안 어떻게 하면 최대한 방탕한 삶을 살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는 엊그제 시험을 하나 낙제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내내 어떻게 하면 빠르고 덜 고통스럽게 죽을지 고민하며 울었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날 지하철에 누군가 몸을 던졌다. 그는 그렇게 의대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일단 돈을 벌어서 여태 부모님이 내주신 의대 학비를 갚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래. 당장 좋은 딸은 못 돼도 일단 살아 있는 딸이 되자. 


그의 질문에 역정을 내지 않고 자연스레 화제를 돌린 스스로의 사회성에 대한 감탄은 얼마 가지 않았다. 정작 그와 싸운 것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약탈 문화재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을 때였다. 약탈 문화재를 보유한 대형 박물관들은 그들이 '세계문화유산'을 보존할 수 있는 가장 첨단 시설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자 그는 타당한 이유라며, 어차피 박물관 입장료는 무료라고 했다. 


"If you have to take a plane all the way to the US from Egypt to see pyramid in the museum, is that free?" (이집트 사람이 피라미드 보러 비행기 타야 되면 그게 무료냐?) 


그렇게 나는 그와 싸웠다. 식민지 개척자와 아메리칸 원주민의 '식사'에서 유래된 추수감사절의 전통에 걸맞게. 

작가의 이전글 되물려주고 싶지 않은 담담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