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런 성격이 아닌데, 하면서 이메일을 쓰고 생각했다. 내용은 뉴욕으로 막 이사 온 1, 2학년 후배들에게 혹시 도움 청할 일이 있거나 대화하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두 줄짜리 이메일이었다. 쓰고 나니 사실 내가 받아보고 싶었던 이메일이었다. 내가 입학하던 해에 우리 학과의 박사 입학생은 나밖에 없었다. 원래 입학하기로 예정된 두 명의 학생이 트럼프 정부의 정책의 영향으로 비자 신청을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동기가 없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차차 깨달았다. 수강 표를 잘못 짜서 첫 2주간 잘못된 강의를 들었을 때, 학년 말 시험을 혼자 쳤을 때, 전공 수업을 교수에게 과외받는 마냥 혼자 들었을 때 (그리고 그 교수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을 대상이 없었을 때).
입학 전에 나는 학교 홈페이지에서 알아낸 4학년 학생에게 이메일을 보낸 적이 있었다. 학교에 대한 경험과 지도교수에 대한 평가를 듣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답장이 왔다.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어떻게 알아냈냐는 내용이었다. 재학생 입장에서는 좋든 싫든 계속 다녀야 하는 학교고 관계를 이어가야 하는 지도 교수인데 나의 이메일이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 이후로 답장은 없었다.
초등학생일 때 친구 집에 몇 번 가보고 우리 집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친구 집 식구들은 같은 시간에 같은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우리 집은 배가 고프면 각자 냉장고에서 찬거리를 꺼내거나 가스레인지 위에 미리 만들어둔 요리를 데워서 먹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라면을 끓여먹거나 참치 캔을 따거나 계란 프라이를 해 먹었다. 우리 엄마가 라면 자주 먹으면 죽는다고 그랬어. 내가 라면을 자주 먹는 다고 했을 때 친구가 한 말이었다. 친구네 어머님께서는 아이의 건강을 염려해서 한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8살인 나는 그 말을 듣고 설명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한 번은 아빠에게 우리 집은 왜 다 같이 식사를 안 하냐고 묻자, 각자 배고픈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가 원하는 시간에 먹는 게 가장 합당하다고 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엄마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아빠는 고등학생 때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두 분의 남다른 양육방식이 경험 혹은 경험의 부재에서 기인했다는 생각을 했었다.
작년 8월부터 아는 고양이가 생겼다. 나는 아직도 가영이가 나에게 베푸는 애정을 이해해보려고 애쓴다. 가영이가 묘생 3개월 차쯤 되었을 때 집 앞 차도에서 발견했다. 인도로 옮기려고 다가가서 보니 가영이는 뼈 구조가 다 보일 정도로 말라있었다. 병원에서 영양제 하나라도 놔줘야겠다 해서 데려갔는데 가영이는 기생충 감염으로 2주간 약을 먹어야 하는 상태였다. 선생님, 저는 고양이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요, 그냥 놔두면 죽을 것 같아서 데려온 거예요. 수의사 선생님이 물었다. 길에다 다시 데려다 놓으시게요? 장마철이었다.
가영이는 내가 울고 있으면 배 위에 올라와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베개 옆에 누워있는 가영이가 가장 먼저 보인다. 가영이 입장에서 이해를 하면 할수록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갑자기 코끼리한테 납치를 당했는데, 그 코끼리가 나를 모르는 곳으로 데려간다. 그곳엔 나같이 납치된 인간들이 대기하고 있고, 저 너머에 닫힌 방에서는 인간들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인간 몇이 그 방을 나오더니 이번엔 내가 그 방에 강제로 끌려간다. 다른 코끼리가 내 항문에 플라스틱 막대기를 넣다 빼고 피를 뽑더니 내 분비물을 확대한 장면을 내 몸보다 큰 화면에 띄운다. 코끼리가 다시 나를 자신의 우리로 데려가서 2주간 강제로 약을 먹이고 평생 그 공간에 가둔다. 카프카 소설의 주인공보다 불쌍한 전개다. 나라면 이 코끼리가 자고 있을 때 목덜미를 물어버릴 것 같은데, 가영이는 마치 늘 해온 일처럼 코끼리만 하게 보일 첫 인간 친구에게 다정함을 베푼다.
막상 나의 이메일을 반기는 후배의 답장을 보니 더 당황스러웠다.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생각했다. 어릴 적 아빠는 내가 순대가 먹고 싶다고 해서 밤늦게 유일하게 영업 중인 이마트에 데리고 가 순대를 먹였다. 사 남매를 홀로 키우신 친할머니께 아빠는 뭐가 먹고 싶어도 쉽사리 얘기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나는 어릴 때 유치원 가기 싫다고 매일 울었는데 어느 날 미술시간에 엄마가 유치원에 찾아왔다. 일하다 오느라 정장 차림으로 유아용 의자에 앉아 물감칠을 하던 불편한 자세가 기억난다. 그 나이 때 엄마는 엄마가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아이다호는 한반도의 두배 크기로 동양인의 인구는 0.2% 미만이다. 당시 나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준 친구는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의 휠체어를 밀어주던 아이다. 그다음에 말을 걸어준 친구들은 학교의 유일한 레즈비언 커플이었고, 그다음에 말을 걸어준 친구는 유일한 흑인과 필리핀 혼혈인 친구였고, 그다음에 말을 걸어준 친구는 모르몬교라는 이유로 놀림을 받던 친구였다. 모두 다정함의 발명가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