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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치 Jan 10. 2022

다정함은 고갈되지 않으므로

타인을 멍청하다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지적 게으름이다. 이러한 생각 방식은 학업에 잘 맞았지만 삶에서, 타인에게서, 사회에서 발견하는 모순들에 나는 쉽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모순은 모순으로 존재한다기보다 가설과 논리가 덜 탄탄할 때의 잠정적 상태라고 믿는다. 


진실은 단일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 모순에 무관심할 때 진실이 또렷이 보이는 순간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한 때 긍정심리학에 심취하셨고 나는 그 모습에 종종 숨김없이 진저리를 쳤다. 그마저 아버지는 긍정하셨다. 비가 오는 날에 아버지는 오빠와 내가 꼭 우산을 잃어버리고 오는 것을 알고 우산을 하나씩 사 오셨다. 우산을 잃어버렸다고 하면, 너 덕분에 오늘 누가 비를 피했구나, 그럴 줄 알고 하나 더 사 왔어. 하고 웃으셨다. 


이 세상에 아버지가 긍정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영화 상영시간에 쫓겨 초조한 마음으로 탑승한 엘리베이터 문이 1층부터 7층까지 꼬박꼬박 열릴 때도, 층층이 구경하고 좋네, 하셨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비행기를 놓쳐 다음날 망연자실한 상태로 공항을 가는 택시 안에서도, 네가 좋아하는 날씨에 가게 되었네! 하셨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 그가 만들어준 기적의 논리들이 자기 계발서의 산물이라고 생각했었다. 친할아버지는 아버지가 내 나이가 되기도 전에 돌아가셨는데 아버지가 재수생 시절 시험을 치고 돌아오는 날, 웃는 거 보니까 시험 망쳤구나?라고 물으시곤, 잘했어, 하시며 웃으셨다고. 


회의주의가 기본값이라고 믿었던 나도 간혹 아버지와 친할아버지에게 빙의가 되는 순간이 있었다. 얼마 전 친구가 몇 년 만에 시작하게 된 연애관계에 대한 고민 상담을 했다. 나는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만을 이야기했다. 그 관계가 설령 망하더라도 너는 그것을 재능으로 환전할 수 있는 커리어를 걷고 있잖아. 그의 직업은 배우다. 


작년에 오래 알고 지내고 싶은 이를 만났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늘 거리낌이 없었다. 나의 스스럼없는 모습에 대해 그는 이렇게 빗대었다. '보통은 지하철 칸 맨 끝짜리에서 가운데로 점점 옮겨 앉잖아.' 그는 그 앞에서만 발현되는 나의 모습을 내 성격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한 때 나를 쫓아다니던 물리학자가 있었다. 흔히 상상하는 물리학자의 모습과 다르게 그는 다소 화려한 색감의 옷을 즐겨 입고 길에서 나오는 음악에 맥락 없이 춤을 췄고 일할 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취해있었다. 너는 걸어 다니는 해바라기 같아. 실험실에서도 웃고 있어? 그는 5분 거리에 사는 동네 이웃이기도 해서 언젠가 우연히 그가 지나가는 모습을 봤다. 대부분의 사람처럼 무표정이었다. 그게 내가 본 최초의 그의 무표정이었다. 그제야 그가 늘 헤실거리고 웃는 것이 성격이 아니라 나를 맞이할 때 '즐거울 준비'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를 만나면 필연적으로 외로워질 거야. 나는 누구라도 멀어질 수밖에 없을 말로 그를 내쫓았다. 그의 호의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는 없었다. 그가 남기고 간 호의는 박물관의 전시품 같아서 만지지 않아도 되고, 무겁게 집에 들고 오지 않아도 되었다. 가뿐한 마음으로 감탄할 수 있었고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2021년의 막바지에 나는 꽤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무슨 일이든 가루가 될 때까지 곱씹는 내 모습이 지겨웠다. 뜬금없게도 나와 정반대의 인생 가치관을 듣고 회복했다. 누군가가 이미 지나간 일은 과거에 묻어두고 빨리 앞으로 나아가야지,라고 하며 감정 '낭비'를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댔다. 하다못해 감정마저 자본주의의 검열을 거치다니. 감정은 자원이 맞지만 고갈되지 않는다. 평소 같았으면 반박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텐데 문득 깨달음이 태평한 모습으로 찾아왔다. 나는 옆으로 나아가고 싶은 사람이구나! 모두의 시점으로 한 번씩 서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싶은. 누구를 등질 일 없이.  


새해 다짐은 가끔씩만 제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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