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사춘기 15화.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

우리는 저마다 꿈꾸던 노래를 산다

by 서호근
야무지다. 부지런하다. 차분하다. 밝다.


H를 한 단어로 함축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직업상 항시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일상의 틈과 틈 사이를 여러 봉사로 메우는 사람이다. 그 와중에 수영에도 진심이어서 그나마 걷기가 유일한 운동인 나를 수영의 세계로 유혹하기도 한다. 체력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저게 가능하다고?’라는 의문이 들 만큼, 마주칠 때마다 늘 다른 역할과 모습으로 나를 놀래 킨다. 몸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도 표정은 느긋하고, 고요해 보여도 반가운 사람 앞에서는 금세 뜨겁게 온도를 올린다.


최근에는 가뜩이나 바쁜 사람이 새로운 직책까지 맡게 됐다. 축하해도 될지 망설여진다는 내게 H가 답했다. 하고 싶어서 수락하였다고. 거짓 한 점 없이 기쁜 얼굴이었다. H는 거절하기 불편하다고 해서, 억지로 책임을 떠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래저래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도 혼자서 돋보이려 하지도 않는다. 조금 더 안다고 조금 더 잘한다고, 상황이나 분위기를 끌고 가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부족함을 냉철하게 수용할 줄 안다. 그리고 각자일 땐 투박하고 서툴기 그지 없는 서로가 서로를 채워주는 호의를 믿는다.


내가 아는 한정적인 단어와 문장으로 풀어놓자니, H는 비현실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실제로 내 곁에 존재하는 사람, H는 그래서 나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완벽한 사람에게서 작은 흠 하나를 찾아내 깎아내려는 수작질은 아니다. 작은 일에도 일희일비하고 실바람에도 갈대처럼 휘청거리는 성격의 소유자로서, 큰 돌에도 잔잔한 물결조차 일지 않을 것 같은 견고함의 비결이 궁금했다.




그 실마리를 풀 기회가 생겼다. H와 언제 한 번 밥이나 먹자던 약속이 이뤄졌던 것이다. 그는 밝은 만큼 맑았다. 어떤 화제로 대화를 이야기를 이어가야 할까 고민하던 사이, 그는 부끄럽고 어쩌면 어두워 보일 수 있는 모습도 스스럼없이 꺼내 보여준다. 덕분에 나 역시 무장 해제되어 그럴 듯하게 포장하지 않고 바닥에서부터 나다운 나를 보여줄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흑역사조차도 나라는 역사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보다 내가 먼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하는 품이 필요하다는 걸, 그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시청 앞 지하철 역에서 너를 다시 만났었지
신문을 사려 돌아섰을 때 너의 모습을 보았지..

그리고 H를 통해 색다른 낭만을 발견했다. 다른 날 H를 포함한 일행과 함께 어디론가 가던 길, 차에서 이 곡이 흘러나왔다. 철저히 내 취향에 따라 선곡한 추억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우리는 각자의 20대를 떠올렸다. 곡이 끝나갈 무렵 H는 자신의 젊은 기억 한 조각을 나눠준다. 고향에서 이 노래를 들으며 학교에 다니던 소녀는 언젠가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진짜로 시청 앞 지하철 근처를 매일같이 오갔다고. 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릴 때마다 이 노래가 머릿속으로 자동 재생되며, 자신이 가사의 일부가 된 것 같은 벅참에 찼다. 꿈꾸던 노래 속에서 사는 기분이란, 오묘하게 감동적이고 시큰하다. 대학교 시절 한정된 용돈으로 다음 학기 교재를 장만하려 청계천 헌책방을 누빌 때마다 어릴 적 읽었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속의 세상에 들어온 것 같은 황홀한 성취감을 느꼈노라고, 나 역시 맞장구를 쳤다.


영화 ‘비긴 어게인’에서 싱어송라이터인 ‘그레타’와 스타 음반 프로듀서인 ‘댄’이 서로의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하며 도시를 누비던, 너무나 평범해서 밋밋하기까지 했던 일상이 한 편의 영화되고 한 곡의 노래가 되는 시간을 우리는 산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오늘이 쌓여 나라는 책 한 권이 완성된다. 이따금씩 적어도 내게는 오래 기억될 영화 속 명장면이 펼쳐진다. 누가 읽어주든 그렇지 않든, 그 자체로 보탤 것 없는 이야기다. H처럼 매사 즐겁고 열정적으로 살 자신은 없다. 아니,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나 모양 빠지는 순간도 다정하게 비춰주는 OST 한 곡 정도는 내게도 있지 않을까. 머리 위 하늘빛과 주위를 둘러싼 소음에 마음이 일렁이는 지금처럼.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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