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후 갑자기 많은 눈이 내렸다. 비어가는 냉장고를 채우러 잠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 하얗고 부드러운 눈길 위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고요한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눈은 모든 것을 덮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낸다. 그래서인지, 그 속에서 마주친 작은 발자국들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나보다 앞서 걸은 흔적들 중에서 귀여운 강아지 발자국을 보았다. 아마도 보호자의 것일 커다란 두 발자국 옆에 나란히 찍힌 작고 가벼운 무게. 그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그들의 산책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했을지 그려졌다. 발자국 크기로 가늠할 때 아마도 작은 몸집의 이 강아지는 타박타박 차가운 눈길을 걷는 동안 수시로 보호자와 눈을 맞추며 사랑을 확인했을 것이다. 보호자 역시 강아지의 짧은 보폭에 맞추며 천천히 천천히 자신을 향해 뛰는 작은 심장과 마음을 나누었겠지. 그들에게는 다른 어느 날과 다름없을 풍경을 보지 않아도 흐뭇한 눈빛으로 느껴볼 수 있었다. 보호자와 강아지가 서로를 의지하며 걸었던 그 길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순간이 전해졌다.
그들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내 삶의 발자국을 돌아보았다. 나는 그간 살아오면서 어떤 발자국을 남겼을까?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이런 따뜻한 흔적이 될까? 누구나 사는 동안 각자의 길을 내고 수많은 발자국을 남긴다. 그러나 그 발자국이 단순한 흔적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에게 기쁨이나 위로, 뭐라 정의내릴 수 없는 사소한 의미라도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가치 있는 길이지 않을까?
행복을 꼭 대단한 데서 찾지 말 것
강아지의 작은 발자국을 보며, 문득 ‘행복’이라는 것이 꼭 대단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발자국 속에 보호자와 함께 행복이 담겼다. 둘은 특별한 목적지나 대단한 일정을 따라가는 여행자가 아니었지만, 함께 걷는 그 순간만으로도 충만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진 발자국 하나하나가, 그들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 말해준다. 삶에서 행복은 때론 아주 작은 것들 속에서 빛을 발한다. 행복은 그 작은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발견하는 일이다.
고백하자면 새해가 밝고 약간의 조바심이 생겼었다. 이 나이 되도록 어떤 대단한 존재로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여전히 거저 나이를 먹은 주제에 세월의 지혜를 얻은 것처럼 태연해도 될 것인가. 불안하고 예민했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강아지 발자국이 내 어깨를 토닥인다. 내가 만든 길은 내 뒤에 있다고. 지금까지 나는 결코 크고 화려한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작은 일들이 모여 나만의 길을 만들었다. 그 길이 누군가에게는 나름의 이정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저렇게 살아도 별 문제 없겠다 혹은 저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하는. 내 발자국을 따라 다른 누군가가 걷는 상상을 해본다. 그 사람에게도 드물지만 선물 같이 찾아들었던 따뜻함과 평화로운 순간이 찾아온다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새해 소원을 수정해야겠다. 뭔가가 되고 싶다며 비장하게 굴었던 대신 남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더 많은 사랑과 따뜻함이 남는 삶을 살아야겠다. 작은 발자국들이 이어져 길이 되듯, 내 작은 친절과 배려, 관심이 누군가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그 인상이 다시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채울 수 있다면 좋겠다. 내가 걸어가는 길이 누군가에게도 따뜻한 길이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강아지의 발자국이 밋밋했던 오후 세 시를 위로와 희망으로 물들였다. 우리가 남기는 흔적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고 격려하고, 모두의 현재를 뿌듯하게 만들었다. 우리 각자의 발자국은 시간이 지나면서 옅어지겠지만, 그것들은 서로 얽히며 큰 그림을 만들고 세상을 더욱 활기 있게 해줄 것이다. 내가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내가 남기는 흔적이 누군가의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면 더 없이 큰 영광이겠다. 작은 발자국들이 모여 하나의 아름다운 길을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도 뭔가 있는 평범함으로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