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걸린 아재의 육아 일기(1)
내게 가장 중요한 육아
우연히 앵두(내 하나뿐인 딸, 현재 만 5세이다.)의 이마를 만져봤더니 끓은 물이 가득 담긴 주전자처럼 뜨겁다. 놀란 맘에 체온계를 가져다 귀에 가져다 대었더니 체온계는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화를 내는 듯 화면을 붉게 바꾼 채 아이의 체온을 알려준다.
38.8도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는 해열제를 꺼내 한 스푼 가득 먹이고 수건에 찬 물을 적셔 계속 몸을 닦아줬다. 날 닮아 약발이 잘 받는 체질을 타고난 앵두의 체온은 천천히 내려간다.
다음 날 아침 앵두를 병원에 데리고 가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는 인구 50만 이하의 지방 도시. 얼마 전 뉴스에 보도된 것처럼 소아과 찾기가 매우 힘들다. 특히 아이에게 적절한 처방을 해주는 병원을 의미한다면 더더욱.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대기실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접수 대기 인원은 30여 명이다. 진료 대기 인원이 아니라 접수 대기 인원, 접수를 아직도 하지 못한 사람의 숫자 말이다.
접수대에는 더더욱 무서운 말이 쓰여 있다.
호명 시 대기실에 계시지 않으면 번호표를 다시 뽑아야 합니다.
숨이 막힐 것처럼 가득한 인파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료실을 떠난 환자들로 인해 진료에 혼선이 벌어졌는지 의료진들이 만들어낸 고육지책 같았다. 왁자지껄 시끄러운 병원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런 선택을 한 그들이 이해가 간다. 한 시간을 기다려 3분의 진료를 받고는 앵두의 열과 코감기를 낫게 해 줄 처방전을 받아 병원을 나섰다.
물론 앵두와의 여정은 일반적으로 어른들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약국에서 약을 받고 바로 지하 주차장으로 이동하려 한 나의 계획과 병원 대기실 안 음료수 자판기에 있는 제티를 먹기 위해 다시 3층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앵두의 계획은 정면으로 부딪혔다. 후퇴를 모르는 앵두와 싸우느라 시간을 소비하느니 후딱 음료수를 뽑아주는 게 더 빨리 집에 갈 수 있다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앵두의 의견을 따랐다. 5분 후 앵두의 손에는 제티라는 캔 음료 하나가 쥐어졌고, 빈 캔이 될 때까지 앵두는 나의 제안에 고분고분 따르는 착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다음 일정은 동네 문화센터에서 열리는 발레교실. 혹시라도 오해할까 싶어 자세히 말하자면 이마트 문화센터 발레교실의 3달치 비용은 10만 원 정도이다. 예전에야 발레 같은 운동은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겠지만 이제는 적은 비용으로도 체험해 볼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들이 많이 있다. 물론 발레 선수를 시키겠다느니 그런 것은 아니다. 내 육아 원칙은 ‘주말은 아이와 밖에서 놀아야 한다!’는 것이고, 주말에 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찾다 보니 앵두가 좋아하는 발레를 꽤 오랫동안 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발레 강습 시간이 45분에 불과하다는 것. 주말은 총 48시간이고 잠자는 시간 20시간을 빼도 28시간이 남는다. 이 28시간을 멋진 계획으로 채우는 것이 내가 매주 해결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이번 주도 어김없이 인터넷에 ‘**시 실내’라고 검색을 했고(이번 주에 비가 올 줄 알았다) ** 교육원에서 아이들을 위한 행사를 개최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위치도 발레 강습이 있는 장소 근처라 쉽게 갈 수 있었다. 교육원으로 이동하는 중 차 안에서 쪽잠을 자고 체력을 회복한 앵두는 왕성한 기운을 자랑하며 성큼성큼 교육원으로 들어갔다.
건물 밖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은 앞으로 우리가 느낄 즐거움을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안내테스크에서 이름을 확인하고 힘차게 2층으로 향했다. 에코백 만들기, 쿠키 만들기, 모형 꽃 만들기, 다도 체험, 가족사진 찍기, 편지 보내기, 육아 강의(아이가 듣기에는 너무 지루해서 앵두와 난 근처 커피숍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고 왔다), 그리고 대망의 밴드 공연. 너무나 알차고 신나는 프로그램들이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에 오니 저녁 7시 아침 8시 반에 나왔으니 앵두와 단 둘이 10시간가량을 밖에 있었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으면서 무언가 해냈다는 성취감도 몰려온다.
난 현재 결혼 10년 차의 40대 남성이다. 결혼하고 한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가 없어도 살아가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는 아이를 많이 원했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혼 3년 만에 우리에게도 아이가 생겼다.
테스트기로 아내의 임신을 확인했을 때의 묘한 느낌이 기억난다. 가슴이 콩닥거리면서 기대가 되었다. 아빠가 된다는 설렘도 컸다. 당시 외국에서 거주하고 있었기에 아이를 낳기까지의 많은 고난이 예상됐지만 그 고난을 피할 마음도, 방법도 없었고 온전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40년가량 이기적으로 살아온 내게 육아의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아직 아빠로서의 탄탄한 마음과 각오를 다지지 않은 상태에서 앵두는 세상에 '으앙' 하고 울며 나왔고, 24시간의 육아(당시 아내와 나는 휴직 중이었다)는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다.
국내로 돌아와 다시 직장에 복귀했고, 아내와 나는 한국의 전형적인 맞벌이 부부로 아이를 키웠다.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주말 부부였기에 평일에는 육아의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음껏 술을 마셨고 회사 사람들과 어울렸다. 암에 걸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