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구성원 3인(본인, 엄마, 아빠) 중 서열 3위.
공주-부하 놀이에서 부하 역할 전담.
목마 태워주는 사람.
주말마다 놀이터나 공원에서 함께 노는 사람.
본인이 놀고 싶을 때 놀아주고 책 읽고 싶을 때 같이 읽어주는 사람.
하지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을 받을 때는 절대로 선택하지 않는 사람.
바로 앵두에게 인식된 나의 모습이다.
40대의 성인이 아이와 노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체력이다. 아이는 지치지 않는다. 성인의 체력은 배터리처럼 천천히 줄어드는 데 반해 아이들은 전혀 줄어들지 않다가 어느 순간 꺼져버리는 느낌이다. 어떤 놀이든 두세 번 하고 나면 그만할 법도 한데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간다. 체력이 부족해 더 해줄 수 없기에 어떻게든 아이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다.
또 다른 이유는 같은 놀이를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세상 모든 것이 시시해 보이는 40대 아재에게 무언가를 반복하는 것은 지루해서 견디기가 어렵다. 문제는 요즘 앵두가 한참 필 받은 놀이가 있다는 것. 바로 공주-부하 놀이다. 공주-부하 놀이는 이렇게 한다.
우선 누가 공주를 할지, 부하를 할지 정한다. 본인은 여자, 나는 남자라는 이유로 항상 본인이 공주를 하고 나에게는 부하를 시킨다. 부하만 하고 싶지는 않아 왕-부하 놀이를 하자고 하면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게 늘 억지를 부려 공주가 된 앵두는 소파에 앉아 우아하게 손을 내민다. 그러면 난 무릎을 꿇은 채 손을 공손하게 잡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간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무얼 하느냐. 손을 잡지 않고!”라고 호통을 친다. 황급히 손을 붙잡으면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나 명령을 내린다.
“카펫을 깔거라.”
나는 얼른 내 방에 있는 이불을 길게 접어 앵두의 발에 놓는다. ‘공주 마마, 이 카펫의 색깔은 그냥 빨간 색인 것으로 해주시 옵소서.’라고 부탁하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꽃무늬가 그려진 하얀 이불을 빨간 카펫으로 변경해 주는 넓은 아량을 베푸신다.
앵두는 카펫을 살포시 밟으며 일명 추운 방으로 향한다. 추운 방은 각종 잡동사니를 모아 둔 방이다. 가족들이 잘 드나들지 않아 보일러를 켜지 않고, 2중 단열창만을 사이에 둔 채 외부에 연결되어 있어 실제로 몹시 춥다. 그래서 앵두는 보통 나를 그리로 유배 보내곤 한다. 그런데 추운 방에는 본인의 장난감이 한가득 있어 공주 물건들을 가지고 나오기 위해 그곳을 방문한다.
추운 방에 도착한 앵두는 그날의 콘셉트에 맞는 장난감을 선택한 후 자신의 손에 쥐어달라 명한다. 보통은 시크릿 주주 마법봉 같은 긴 형태의 봉이나, 왕관, 공주용 드레스 등을 고른다. 원하는 장비를 장착한 앵두는 안방으로 이동해 본격적으로 공주로서의 일상을 누린다. 가끔은 갑질 공주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사실상 앵두는 ‘하거라~’라고 문장을 끝맺고 나는 ‘하옵소서~’라고 말을 마치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다른 건 없다. 공주-부하 놀이가 어떻게 끝나는지는 잘 모른다. 그렇게 놀다 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 다른 놀이를 하고 있으니까.
놀다 보면 나는 앵두에게 “아빠 좋아?”라는 질문을 하곤 한다. 원래 사랑은 늘 확인받고 싶은 거니까. 내 질문에 앵두가 의외의 답을 한다.
“나 요즘에 좀 아빠가 좋아졌어.”
“그럼 예전에는 싫었어?”
“어.”
“왜?”
앵두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그것도 모르냐는 듯 쳐다보며 말한다.
“못 생겼잖아.”
허탈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어쨌든 공식적으로 날 좋다 하니 기분이 좋다. 하지만 앵두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내가 못 생겼다고? 앵두 너 아빠 닮았어!’
언젠가는 왜 아빠를 닮게 낳았냐고 따지겠지? 후후. 앞으로도 티격태격하며 지낼 우리의 미래가 눈앞에 훤히 보인다.